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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최후의 기만술은 성령의 증언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가려 뽑은 기별 2권 78 페이지)

선과 악의 대 쟁투가 시작된 이래, 하나님께서 선택한 당신의 대언자 엘렌 화잇을 통해 주신 증언의 말씀에서처럼 사단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의 계교가 적나라하게 폭로되어 약세에 몰린 적이 과거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왜 사단이 이러한 예언의 신의 영향력을 말살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주어진 예언의 신 기별을 그의 소원대로 이 땅에서 제거해 버리지는 못하겠기에, 사단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이 기별의 효력이 상실되도록 쉬지 않고 노력을 기울여 왔다. 사단이 이러한 술수를 쓰리라는 건 우리가 가히 예상해온 바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재림교인들에게 있는 거의 모든 장점들이 바로 그들에게 주어진 예언의 신 덕분 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이 그 증언들을 말살해 버리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다. 예언의 신을 대적하는 세력은 옛날부터 있었으며 그에 상당한 일반적인 이유들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재림 신앙의 교리들을 칼빈주의 신학이 주창하는 교리로 바꾸려는 일부의 움직임이 있는 지금, 예언의 신을 대적하는 좀 더 구체적이고 심각한 이유들이 표면화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지금까지 예언의 신이 멸시되었던 경우들의 배경에 존재해온 다음과 같은 일반적 이유들을 우리가 다시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죄에 대한 애착

“저들이 여러 가지로 가장하지만 저들이 의심하고 회의 사상을 품는 진정한 원인은 그 대부분이 죄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는 연고이다.” (정로의 계단, 111 페이지)

이 말씀은 너무나 자명하므로 더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별 생각 없이 성급히 지나쳐 버릴 내용이 아니다.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며 몇 번씩 상고해 볼 주제라고 생각한다.

훈계와 견책에 대한 반감

어떤 이들은 그들의 그릇된 의견에 대한 교정 혹은 숨겨지거나 들어난 죄에 대한 꾸짖음과 같은 훈계와 견책적인 예언의 신 말씀을 수용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 견책의 말씀이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며 다시 오실 주님의 날을 위해 잘 대비하도록 인도해 주는 사랑의 사역임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이들은 이런 사랑의 훈계와 견책을 그 어떤 적으로 부터 오는 인신공격으로 여기며 수세적인 태도를 취하곤 한다.

“그분의 영의 증언들은 성경을 주목하도록 호소하고, 그대들의 품성의 결점들을 지적하고 그대들의 죄를 책망한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그 증언들에 유의하지 않는다. 그대들의 육신적이요 안락을 좋아하는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그대들은 그 증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한다.” (교회 증언 제 5권, 234 페이지)

지적 자만

대체적으로 고등 교육이 그 수여자로 하여금 예언의 신 증언들을 무시하고 거부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 세상에서 받은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자신의 의견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는 듯 보인다. 높은 학위를 가진 사람들 일수록 미천한 주님의 대언자가 주는 훈계와 조언을 수용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운 모양이다.

필자는 한때 예언의 신을 강하게 옹호해 오던 명망있는 한 재림 신학자가 갑자기 “우리가 엘렌 화잇으로 하여금 성경 말씀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하면 안 된다”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여 심하게 당황한 적이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신학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죄짓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치 않다는 칼빈주의 오류사상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가 화잇 부인의 증언들이 자기가 받아들인 이 칼빈주의 사상을 지지한다는 견해를 유지했지만, 그녀의 글들이 확연히 그러한 이설을 거부하고 있다는 많은 증거에 접하게 되자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 때 이 신학자는 자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던지 아니면 화잇 부인의 입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던지, 둘 중의 한 선택을 하여야만 했다. 이러한 기로에서 그는 마침내 엘렌 화잇이 성경 말씀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하면 안 된다며 강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엘렌 화잇은 성경 말씀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단지 오류적인 칼빈주의 성경 해석들을 거부하고 있었을 뿐이다.

만일 이 신학자가 그 때 이렇게 예언의 신 말씀에 대한 신뢰를 훼손시키려고 작정치 않고, 이 영감의 권면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였더라면 그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영혼에도 얼마나 더 좋은 보탬이 되었을까!

지위 신분의 자만

오래전부터 유래된 “권력은 부패하기 쉬우며,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라는 한 격언이 있다. 권력과 권위가 부여된 높은 지도자적 직위에 있는 이들은 이러한 면에서 지속되는 위험에 직면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원수 마귀는 이 지도자들에게 그들에게 주어진 권위적인 지위로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대신하도록 항상 유혹하고 있으며, 또 하나님 사업의 이행을 위해 어떤 정책들이 가장 적합한지에 대한 그들의 의견이 너무도 현명해서 예언의 신에 담긴 영감적인 권면들과 비교해 볼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이 지도자들에게 알랑거리며 추켜세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이 주어졌음을 이 지도자들이 항상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고를 버리고는 공의롭고 신중하게 행할 수 있는 침착성과 지혜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로 인도함을 받지 아니하고 인간의 지혜를 따르는 것처럼 무섭고 절망적인 질병은 없다.” (부조와 선지자, 658페이지)

세상적 이점(利點)의 매력

이 점은 지금 논해지고 있는 문제점들 중 가장 미묘한 성격의 요소인 것 같다. 그 이유는 이 세상적 이점이 교회에 이익이 되는 것으로 가장되어 우리에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언의 신은 우리 의료 기관들을 너무 크게 확장치 말고 소규모적으로 유지하며 환자들에게 건강 교육을 시킴과 동시에 영적 감화를 끼치는 것에 중점을 두도록 우리에게 권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요양원들을 중병을 치료하는 대형 의료기관으로 개조했을 때 갑자기 늘어나는 입원 환자들의 수와 재정적인 후원을 보면서, 우리는 예언의 신이 준 영감적인 권면보다 더 훌륭한 결정을 했다고 자화자찬 하면서 서로의 등을 두들겨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멀지 않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고의 의미심장한 뜻을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만 같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 계획한다면 주께서는 우리가 실수하도록 버려두실 것이다.” (시대의 소망, 369페이지)


위에 언급된 것들은 지금까지 우리 가운데 있어온 성령의 증언을 거부하거나 무력하게 만들려던 시도들 뒤에 숨은 진짜 이유들의 부분적인 사례들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예언의 신에 대한 산발적이고 돌발적인 공격들이 가끔 우리 가운데 일어나 왔었다. 하지만 이렇게 과거에 있어왔던 공격들은 지금 우리 신학과 교리를 변조시키려는 목적으로 영향력있는 일부 인사들에 의해 조장되고 있는 고도의 조직적 반대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재림 신앙을 칼빈주의 신앙으로 바꾸기 위해 우리의 신학을 변조시키고자 하는 이 시도는 지금까지 우리가 겪었던 그 어떤 반대세력들 보다도 훨씬 더 맹렬하게 예언의 신 증언에 대해 공격을 가해오고 있는 바이다. 바로 이런 현상들이 우리가 마지막 시기에 가까이 와 있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가 아닐까? 그리고 지금 이렇게 예언의 신에 대해 긴박성을 띠며 적극적인 공세를 벌이고 있는 현상을 볼 때, 이 반대 세력들이 이제 칼빈주의와 예언의 신 말씀 사이를 조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이 두 신학 조류가 더 이상 같은 교회 안에서 공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느낌이 든다. 이 중 하나가 제거되어야만 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우리 가운데 칼빈주의를 지지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예언의 신이 문제점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들이 오류로 폐기처분코자 하는 우리의 모든 교리들을 이 예언의 신 말씀이 진리로 확고하게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화잇 부인의 증언들이 이들에 의해 말살 대상으로 점찍어진 모든 재림 신앙 신조들의 완전 무결성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일 뿐만 아니라 또 신학적인 진리들은 밀접히 서로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여러 가지 주제들에서도 이 칼빈주의 교리들과 예언의 신 증언 말씀 사이에 대립적 충돌이 있음을 우리가 점점 더 명확하게 목격하게 되는데, “뻔뻔스러움으로 말미암는 불의” (unrighteousness by presumption)를 주창하는 칼빈주의 교리를 우리가 예언의 신 말씀과 비교해 볼 때, 모든 세부적 항목들 하나하나 마다 이 둘 사이에는 아주 심한 불일치가 표명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칼빈주의자들은 우리 인간의 본성이 너무 타락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그 본성을 결코 회복하거나 복구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하나님의 대언자인 엘렌 화잇은 분명히 증거하기를, 우리 인간의 본성이 물론 타락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존해 그 타락된 본성이 이생에서 변화되고 정복되며 개조되어 기품이 있게 부드러워 질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아 고상하게 성화되어 그 본래의 순결함을 회복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품과 합하여져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랄프 라슨 박사의 저서, Tell of His Power 198-203페이지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예언의 신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이생에서 죄 범함을 그칠 수 없기에 우리는 칭의 즉 용서 받음으로서만 구원을 얻게 되며, 성화의 추구는 훌륭한 자세이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반해 엘렌 화잇은 성화를 불러오지 않는 칭의는 그 자체가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거짓 칭의임을 증거할 뿐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용서 (칭의)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객관적으로 제공된 구속 행위로만 보며, 우리 안에서 효력을 발휘해 마음의 변화를 수반케 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엘렌 화잇은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하나님의 용서는 단순히 우리를 정죄에서 면하게 해주는 사법적 행위를 넘어서서 우리로 하여금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당신의 능력을 나누어 주는 것도 포함한다고 역설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산상 보훈 114페이지 참조).

또 칼빈주의자들은 “한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라는 이설을 (자기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사실 여러 형태로 견지하고 있다. 그 반면에 엘렌 화잇은 이러한 그릇된 추정이 똑 같이 그릇된 안도감을 이 이설을 믿는 자들에게 야기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칼빈주의자들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재림 때 우리의 품성을 완전하게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엘렌 화잇은 이러한 그들의 주장을 강한 어조로 거부하고 있음을 본다. 적어도 그녀의 글 48군데에서 이러한 이설에 대해 경고를 주었던 것이다. 다음의 글이 그 한 가지 예가 되겠다.

“그리스도께서 오 실때 우리가 가진 타락한 몸은 홀연히 변화됨을 입어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되어질 것이다. 하지만 타락한 성품은 결코 거룩하게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성품의 변화는 그분이 오시기 전에 이루어져야만 된다.” (리뷰와 헤랄드, 1권 543페이지, 1885년 9월 1일)

이외에도 여러 가지 예들을 더 들 수 있겠지만, 위의 인용된 이 예언의 신 말씀 한 가지만 보더라도 우리 가운데로 칼빈주의의 신학적 오류들을 가지고 들어오려는 자들이 왜 엘렌 화잇의 증언들을 그들의 길을 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로 여기고 있는지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이 지금 의도적이던지 혹은 부지중에 성령의 증언을 무력화 시키려는 사단의 시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예언의 신 말씀에 공격의 화살이 부어지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별된 한 대언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권면들을 믿고 귀중하게 여기는 이들은 결코 이런 칼빈주의에 기초한 오류적 이설들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참된 증언에 대한 신뢰심을 동요시키기 위하여 온갖 방법과 종류가 다른 매개물들을 통하여 교묘하게 활동할 것이다.” (가려뽑은 기별, 1권 48페이지)

예언의 신 증언 말씀에 대한 신뢰심을 동요시키고자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위에서 분명히 제시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이제 그 목적을 위해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여러 가지 부정직한 주장들에 대해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 말씀과 엘렌 화잇 중 하나를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

우리 가운데 있는 그 어떤 저자도 엘렌 화잇의 저서들에서 보여 지는 것과 같은 성경 말씀에 대한 정통함을 우리에게 보여준 사람이 없었다. 그녀처럼 성경 말씀을 그렇게 풍부히 인용하는 저자를 내가 본 적이 없다. 한 무작위 실험으로 다섯 권으로 구성된 구속의 역사 시리즈 서적 한권의 가운데 페이지를 펴서 그 앞과 뒤의 50페이지들, 즉 통합 100페이지를 우리가 한번 살펴보았다. 이 100페이지의 견본을 검토해 보았을 때, 거기에서 우리는 약 220 가지나 되는 성경 말씀의 인용과 더불어 여러 가지 인용구화 되지 않은 성경절들의 언급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듯 화잇 부인은 문자 그대로 성경과 함께 살았던 분이었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을 신중히 고려해 볼 때, 우리에게 선택토록 지금 이들이 종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 따져보면 엘렌 화잇과 성경 말씀 사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칼빈주의자들은 지금 엘렌 화잇과 오류적인 칼빈주의적 성경 해석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엘렌 화잇이 신학자가 아니었다는 주장

어떤 측정법의 기준에 근거하여 이 칼빈주의자들이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분명히 그녀의 저작 활동량에 기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엘렌 화잇은 그 유명하고 많은 저서를 산출한 카알 바르트 신학자보다 훨씬 능가하는 2천 5 백만 글자에 달하는 저서를 집필한 분이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또한 그녀가 다룬 주제에 기준한 것도 아닐 것이다. 엘렌 화잇이 집필한 모든 내용들은 신학적 원리를 다룬 것이 아니면 그 신학적 원리의 윤리적 적용을 취급한 글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신학자들이 다루기에 합당한 주제들이었다.

하여튼 이러한 주장에 접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꼭 신학자의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그렇지 않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 다른 삶의 배경과 국면을 가진 남여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특별한 대언자로 택하여 삼았음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이 선지자들을 그들 나름대로의 부류에 속하도록 구분하고 있는 바이다.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학자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인위적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학자들에게 교육을 주어 양성하고 그들에게 학위를 수여하며, 인간이 또 이 신학자들에게 대학의 교수 직위를 주어 거기서 다른 신학자들을 가르치며 글을 쓰도록 하고 있음을 본다. 이에 반에 선지자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 한사람 한사람을 직접 개인적으로 택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이렇게 택함을 받은 선지자 대열엔 사무엘과 같은 청년도 있었고, 아나와 같은 노년의 여성도 있었으며, 농부였던 아모스 그리고 어부였던 베드로를 비롯해 이사야와 같은 시인과 더불어 군인 출신의 모세 등등이 끼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지자들을 우리 인간들이 선출, 임명하거나 승인 혹은 거부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이 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수용하던가 아니면 거절하여 그 결과를 감수하라는 간단명료한 경고만을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고 우리가운데 보내진 선지자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지금 그 필연적인 결과를 감수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엘렌 화잇에게는 (말하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어느 특정 분야에 관해 논할 권위가 없다는 주장

내가 왈라왈라 대학에 재학 중, 그 당시 그곳 신학과의 몇몇 교수들이 선지자는 그에게 할당된 분야 안에서만 그 권위를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이들에 의하면, 엘렌 화잇이 신학적인 주제에 관해 쓴 기록들은 영감적이며 권위적이지만, 건강 생활에 대해 쓴 그녀의 의견들은 영감적이거나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던 신학자들 중 한 사람이 미국 중서부에 소재한 한 돼지 가축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나중에 밝혀지게 되었다.

또 그로부터 수년 후에 내가 신학대학원 학생이었을 당시, 나는 한 신학 교수로 부터 엘렌 화잇은 글은 신학에 관한한 어떤 권위성도 가지고 있지 못하며 다만 윤리적인 분야에서만 그 권위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을 전해들은 한 윤리과 교수는 그의 학생들에게 설명하기를, 윤리적인 주제에 엘렌 화잇의 글들이 권위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녀의 글들은 개인적인 기도서의 역할밖에 담당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교수는 엘렌 화잇의 영감이 교회사의 주제에 그 권위성을 발휘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처럼 예언의 신 권위로 부터의 도피는 돌고 돌아 어디서 결국 막다른 골목에 부닥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어떤 구절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특정한 권면이 필요 되는 곳에 그에 적합한 권면을 보내시는데, 하나님의 대언자들은 그들에게 계시로 보여진 것들을 충실하게 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언자의 역할에 제동을 가하거나 한계점을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권한에 속하지 않은 일이다. 인간이 그의 창조주를 향해 어떤 분야들에 관해서는 선지자를 통해 기별을 보낼 수 있지만 다른 어떤 특정 분야에 관해서는 기별을 보내면 안 된다고 감히 명할 수 있겠는가!

엘렌 화잇으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하면 안 된다는 주장
(하지만 칼빈이나 루터로 하여금 성경을 해석토록 하는 것은 괜찮은 모양이다)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행위 (성경절이 직접적으로 증언치 않고 있지만 그 속에 담겨있다는 뜻을 해설해 주는 것) 과 당연히 깨달아야 했지만 간과했던 성경 말씀의 진리를 알려 주는 행위 사이에는 분명 차이점이 존재한다. 하늘의 별자리를 지목해 주는 행위가 별들을 그 위치에 가져다 놓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듯이 성경에 표명된 진리를 알려주는 행위가 성경말씀에 해설을 가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그 성경 말씀에 전부터 기록되어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들을 올바르게 이해토록 해주는 이런 도움이 많이 필요 되고 있음을 우리가 솔직히 인정해야만 한다. 그 옛날 중세 시대에는 교회가 성경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 막고 서서 일반 신자들에게 성경을 해석해 주었던 때가 있었다. 그 후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과 사람들 사이를 이렇게 막고 있던 교회를 그 위치에서 축출하였고 그 자리에 대신 성령님을 모셔 두었다. 각 사람에게 역사하는 이 성령님의 인도가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에 대한 통일된 이해를 가지게 할 것이라고 이 종교 개혁자들은 낙관하며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바람은 명백하게 실현되지 않았다. 종교 개혁자들 당시보다 더 분분한 성경 해석들이 오늘날 난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면 이런 결과를 불러온 문제점의 근원은 어디서 찿을 수 있는가? 성경에 있는가? 아니다. 성령님에게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에서 있단 말인가? 그렇다. 어떤 다른 결론을 유추할 필요 없이, 문제는 우리에게 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보이사 이렇게 오리무중을 해매는 우리를 돕기 위해 한 특별한 대언자를 보내신 것이다. 그렇게 하신 목적은 성경 말씀에 문제가 있어 그것을 보수하기 위함이 아니다. 성경 말씀엔 개선될 소지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또 성령님에게 문제가 있어 그것을 고치기 위함도 아니다. 그 성령님에게 고칠 점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인간들의 이해에 문제가 있고 개선될 부분이 많기에 그 대언자를 보내신 것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진리를 바로 이해하는데 더디며 또 읽은 성경 말씀에 잘못된 해석을 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정규 교육을 받은 자이던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자이던지, 평신도이던지 신학자이던지를 막론하고 약화된 감지력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대언자의 도움이 필요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이러한 조력자를 보내셨다. 그런데 이런 도움을 우리가 멸시해서야 되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교통하시길 원한다면 우리에게 직접 말하지 이런 대언자를 통해 하실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우기며 거드름을 피우고 거만한 태도를 가져서야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많은 기별들을 직접 보내시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은총을 위태로울 정도로 기고만장 하거나 과시적이 되거나 혹은 영적으로 자만함 없이 감당할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수의 선지자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서 기인함을 알아야 한다.

엘렌 화잇의 글들 중 영감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우리가 분별할 수 있다는 주장

이런 평가 자세는 주님에 의해 금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의 막대한 낭비에 불과한 것이다. 엘렌 화잇의 저서들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온 나는 그 누가 그녀의 모든 글들과 말한 것들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에게 하등 유해될 것이 없다고 신중히 결론 내리게 되었다 (물론 화잇 부인이 나의 이런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엘렌 화잇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유해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가 쓴 그 어떤 글이나 말한 것이 우리의 구원에 절대로 해를 끼칠 수가 없는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 우리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한번 고려해 보는 것은 유익한 일인 것 같다. 다음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한 택함을 받은 대언자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별을 보내실 때, 하나님은 그 누구로 부터의 간섭이나 그 기별을 제지 혹은 조작하는 시도를 허용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나의 교사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증언들의 특징을 판단하고 분석하며 정의(定義)하는 일을 맡기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이 사람들에게 말해 주라’고 하셨다. 이런 일을 꾀하는 자들은 분명히 결과적으로 큰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다.” (가려뽑은 기별 1권, 49페이지)

또 교회 증언 5권, 691페이지는 다음과 같은 권면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형제들이여, 나는 이제 그대들이 나와 백성들 사이에 개입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빛을 외면하지 않도록 탄원하는 바이다. 그대들의 비평을 통하여, 증언들에서 오는 모든 힘, 모든 효과와 능력을 제거해 버리지 말라. 그대들 자신의 사상에 일치시키기 위하여 그대들이 그것들을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 하늘에서 온 빛이며 무엇이 단순한 인간의 지혜의 표현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주셨다고 주장하지도 말라. 만일 증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게 말하지 않거든 그것들을 거절하라.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연합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인간의 궤변과 회의로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시키지 말고,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사업을 무효로 만들지 말라. 그대들의 영적 식별력의 부족으로, 이 하나님의 매개체를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걸리며 잡히게’(사 28:13) 하는 거치는 돌로 만들지 말라.”

엘렌 화잇의 글들은 개인적 기도 예배용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

바로 위에서 읽은 경고 말씀들에 비추어 볼 때, 이렇게 예언의 신을 통제하려 하거나 그 용도를 제한하려 하며 하나님의 선지자와 사람들 사이를 막아서려는 일부 인사들의 어떠한 시도로 부터도 우리는 즉시 돌아서야 할 것이다. 만일 엘렌 화잇의 글들이 이들의 주장처럼 우리 개인적 기도 예배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면, 어찌하여 화잇 부인 자신이 그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그녀는 개인 기도서의 범위를 넘어선 성경 진리들을 취급하는 수많은 저서들을 출간했는가? 그리고 성경 진리에 대한 그녀의 글들이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면, 어찌하여 그녀의 이런 글들이 기도서로서는 적합하단 말인가? 일관성이 전혀 없는 자가당착적인 주장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지만 한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주장과 흡사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단호히 언급했다. 그런데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망상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엘렌 화잇이 모순된 말을 했다는 주장

이러한 주장은 “교리에 대한 질문” (Questions on Doctrine) 이라는 책에서 그 저자가 활용한 논법에서 비롯된 한 직접적인 결과라고 본다. 이들은 엘렌 화잇의 글들에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하면서 그 글들이 말하지 않는 어떤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런 후 나중에 자기들의 해석이 엘렌 화잇의 다른 글들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경우에 직면했을 때, 이들은 자기들의 해석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치 않고 오히려 엘렌 화잇이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우기는 것이다. 진리와 의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수작에 기만당하시지 않으며, 우리도 또한 이런데 우롱당해서는 안 된다. 모순은 엘렌 화잇의 글에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하려는 자들의 산품이지 화잇 부인의 글들에 있지 않은 것이다. 60년간에 걸쳐 2천 5백만의 글자에 달하는 저술들을 계속 써 내면서도 의견을 취소하거나 모순된 입장을 유지하지 않은 그 사실만 보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기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신학의 성숙된 발전이 예언의 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주장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런 주장은 너무 오래되어 진부한 느낌이 들 정도다. 엘렌 화잇이 살아있을 당시에도 이와 똑 같은 주장이 제시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한 때 화잇 부인은 여러 교인들의 입에서 “스미쓰 목사, 버틀러 목사 및 캔라이트 목사 등등이 증언에 대해 전과 같이 존중하는 태도를 더 이상 유지하고 있지 않는다. 그들은 화잇 부인의 사역과 영향이 이제 그 효력을 상실했다고 믿고 있다. 우리의 신앙이 충분히 성숙해져서 증언이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 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 있다” 는 말들이 나돌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계속해서 언급하기를, “내가 방문하는 모든 곳에서 이런 주장들을 접하게 된다.” 라고 서술한 적이 있는 것이다. (1888 년 자료, 684 페이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우리에게 보낸 주님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지할 필요가 있다.

“비록 세월이 흐르고 시련을 겪었어도 우리들에게 주신 교훈은 취소되지 않았으며 다년간의 고통과 자아 희생의 경험을 통하여 증언의 진리가 확립되었다. 이 기별을 전하기 시작한 초기에 주신 교훈은 마지막 날까지 따라야 할 안전한 교훈으로서 고수해야 한다.” (가려뽑은 기별 1권, 41페이지)

예언의 신 말씀은 그 당시 시대를 위해 쓰여졌다는 주장

하나님의 권면의 말씀들은 그것이 성경에 적혀 있든지 아니면 예언의 신에 적혀 있든지를 막론하고 어떤 특별한 시대를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다양한 상태들을 위해서 쓰여졌다. 그 권면의 말씀이 적용될 상태가 존재하는 한 그 권면의 역할은 유효한 것이다. 시간이나 시대의 어느 특별한 지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통상적인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시간” (time) 이라는 단어는 가끔 “상태” (condition) 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엘렌 화잇도 때때로 이렇게 이 두 단어를 유의어로 구별 않고 쓰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만일 엘렌 화잇의 권면들을 거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런 논법을 사용하겠다면, 이들은 그녀의 권면들의 성격을 확정함에 있어 자신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의 정의에 좀더 엄밀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곧 화잇 부인의 권면들 대부분이 특정 시대에 한정되어 있지 않으며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와 의의 영원한 원칙에 기반을 둔 내용들을 취급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전거 소유에 대해 쓴 엘렌 화잇의 증언이 바로 그녀의 글의 낙후성을 증명해 주고 있다는 주장

이 주장은 그야말로 천박하며 빈곤한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만일 화잇 부인이 지금도 살아있다면, 그리고 이 자전거를 구입하고 정비하는데 1890년대 그 당시처럼 오늘날도 한 사람의 평균 연봉에 상당하는 돈이 든다면, 그 시대에 주었던 동일한 권면을 그녀가 우리에게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권면 뒤에는 실제적인 이익과 비용 사이에 있는 불균형이라는 심사숙고가 존재했으며, 그러한 이유는 지금도 그 타당성을 유지하고 있는 바이다.

엘렌 화잇이 표절자라는 주장

먼저 엘렌 화잇에 대해 이런 비난을 퍼붓기 시작한 사람의 배경에 대해 한번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는 한 때 자신의 연합회장과 면담하면서 왜 자신이 그 연합회 내에 있는 한 합회장으로 임명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들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장장 한 시간이나 소모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 연합회장이 내게 직접 말해준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그 옛날에 이와 똑 같이 한 지위를 추구하다가 실패하여 엘렌 화잇을 공격하여 복수해 보려고 했던 캔라이트 목사라는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비난은 법률적인 면만 아니라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측면까지 내포하고 있다. 윤리성과 도덕성의 측면에서 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가 복제되어 언급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실까?

이에 대한 답은 마가복음의 95%가 마태복음과 누가 복음에 복제되고 있다는 신약 성경 전문가들의 의견에서, 그리고 유다서와 베드로 후서 2장을 비교해 보면서, 또 열왕기서들과 역대서들을 비교해 보면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계보”, “사적”, “후예” (generations) 등등으로 번역된 “톨레도쓰” (toledoth) 라는 히브리 단어를 우리가 고려해 볼 때, 모세가 이 창세기를 작성할 당시 이런 자세한 계보를 기록한 그 어떤 사전 자료들을 그가 참조했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창세기 2:4, 5:1, 6:9, 10:1, 11:10, 11:27 등 참조).

이런 사실들을 보면, 아무래도 모든 진리의 저자이며 소유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사람이 어떤 진리를 언급했을 때 그 진리가 이 사람의 전유물이 되어 그 외의 어떤 사람들도 그 사람의 이름을 대지 않으면 그 진리를 언급할 수 없으며 그것이 싫으면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 진리를 다시 언급해야 된다는 우리 인간의 개념에 찬동하시지 않는 것 같다.

인간의 법들은, 제정된 모든 법들이 그러하듯,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엘렌 화잇이 그녀가 살던 시대의 법과 저술 관행들에 의거해 그녀의 글들을 저술했음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한가지 우리가 기억할 사실은, 저술 활동에 대한 인간의 법들은 저자의 아이디어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저자의 돈주머니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글의 원래 저자 이름을 명시한다고 해서 문제가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한 책을 저술하는데 다른 작가의 책에 있는 글들을 너무 자유롭고 풍부하게 당신 책에 인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작가의 책대신 당신의 책을 사기 시작했다면, 모든 인용구들을 그 작가의 글로 빠짐없이 명시했다 하더라도, 그 작가는 당신을 법정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볼 때, 엘렌 화잇이 그 어떤 책들에서 글을 차용하였다 하더라도 그녀가 그 책들을 쓴 저자들의 돈주머니에 타격을 입혔다고 기소될 수 없음은 자명해 진다. 왜냐하면, 글들을 빌려온 그 책들을 재림 교인들에게 구입해서 읽도록 그녀가 공공연히 권장하였기 때문이다.

이 표절문제를 논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엘렌 화잇의 선지성에 대해 고려해 볼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지자들에게 주는 영감은 그분의 계시뿐만 아니라 그분의 감독도 포함한다. 이 선자자들의 글에 빠져있는 것들이 그들의 글에 담긴 내용들만큼이나 성령의 인도에 대한 큰 증거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애굽 사람들의 교육제도 아래서 지식을 쌓고 훈련받은 모세가 어찌하여 여러 가지 건강에 대한 율법들을 기록할 때 애굽에서 횡횡하던 모든 터무니없는 미신적 개념들을 그 책에 담지 않게 되었는가? 마찬가지로 엘렌 화잇이 그녀의 건강 원리들을 저술할 때, 어떻게 하여 그 당시 통용되던 모든 바보짓들과 의학적 무지의 행습들을 그녀의 글들에 담지 않을수 있었는가? 바로 이러한 질문이 코넬 대학의 영약학과 교수였던 클라이브 맥케이 박사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음식물 섭취와 건강간의 관계에 대한 엘렌 화잇의 개념들은 지난 십수년간에 걸쳐 진행된 과학적 연구들에 의해 특이할 정도로 완전히 그 타당성이 증명되었다. 이 주목할 만한 사실에 대해 어떤 이들은 “화잇 부인이 이런 아이디어들을 그 당시 다른 의학 서적들로 부터 빌렸을 뿐이다.” 라고 말하며 설명해 넘기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19세기에 통용되었던 여러 혼합된 지식들 중 어떤 것들은 받아들이며 어떤 것들은 버려야 될 것을 어떻게 그녀가 정확하게 알았는가 라는 질문이다. 그 당시의 지식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경탄할 만한 의학 지식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이런 정도로 완전한 취사 선택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클라이브 맥케이, 한 영양학자가 본 엘렌 화잇, 리뷰와 헤랄드, 1959년 2월 12,19,26 일자)

여러 예언의 신 글들을 인준 없이 편집해 모은 책들은 모두 휴지통에 버려야 된다는 주장

이런 주장을 들을 때 우리는 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누구로 부터 이런 인준을 받으라는 말인가? 그리고 왜 예언의 신 권면들을 편집해서 모은 글들을 이렇게 위협적인 것으로 여길까? 이렇게 화잇 부인의 권면들을 편집 발췌하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칼빈과 루터의 글들을 편집해 모은 책들에 대해 불평을 하는 것을 나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여러 가지 글들의 편집 서적들은 우리 인간들의 평상적인 저작 활동 중 하나이며 그러한 책들은 많은 독자들의 시간과 노력을 절감해 줄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교리에 대한 질문” (Questions on Doctrine) 서적도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여러 문장들을 담고 있는데, 그 자체가 바로 엘렌 화잇의 많은 글들을 아주 부정직하게 오용한 편집 모음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칼빈주의자들이 이 책에 대해서는 불평하지도 않으며 또 그 책을 휴지통에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음이 참 이상할 뿐이다.

예언의 신에 대해 초보적인 지식만이라도 가진 사람은 화잇 부인의 권면들을 편집해 놓은 서적들에 의해 결코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편집된 글들의 문맥을 잠시라도 살펴본다면 그 글들의 문맥적 상황이 무시되었는지 혹은 부적절하게 잘못 인용되었는지 그들이 단번에 감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 서적들을 역정내어 비난하며 중요한 것을 허섭쓰레기와 함께 버림으로 전부를 잃는 짓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성경 연구도 따지고 보면 하나의 인준 받지 않은 편집적 활동이지 않은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5:20)

예언의 신 증언이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예언의 신이 우리 교회와 기관들과 교인들에게 가져다 준 영향은 어떠했는가? 크고 전체적인 안목으로 교회에 끼친 영향을 보거나 아니면 개개인 의 삶에 끼친 세세한 영향들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 보아도, 우리는 동일한 대답밖에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주어진 예언의 신 증언 말씀들은 우리에게 고결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 권면들을 받아들였을 때 축복들이 왔으며, 그 권면들을 거부한 불신들 뒤에는 곧 비참한 결과만이 따랐었다.

캔라이트, 콘라디, 켈록 그리고 포드 등등의 비극적인 경험들을 우리가 보았다. 또 호주의 브리스배인 시에서 약 한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아주 큰 아보카도 농장 가운데 다른 관광 명소들과 더불어 한 넓직한 요리점이 소재해 있다. 이 식당 앞에 달린 간판에는 일주일 중 칠일 모두 개업한다는 안내문이 적혀 있으며, 이 식당의 메뉴는 이 식당이 부정한 동물의 고기들을 포함한 각종 음식들을 제공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 식당에서 일하는 웨이터들과 웨이트리스들 중 몇몇은 이 식당 주인인 로버트 브린스미드씨의 어린 친척들이라고 하였다. 이곳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북미주에 소재해 있는 여러 우리 재림 병원 단체들이 곧 재정적인 붕괴를 당할 것이라는 신호가 주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 북미주의 12개 대학들에 등록되는 학생들의 수가 반 정도 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보도도 들리고 있다. 게다가 어떤 고등학교들은 이미 문을 닫고 있는 중이다. 이런 모든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들이 바로 우리가 예언의 신 말씀을 따르지 않은 불신의 결과인 것이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 (에레미야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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