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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교수 / 평택대학교 신약학, 스텔렌보쉬대 신학대학원(Th.M, Th.D)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목회1: 왕직


그리스도의 목회가 실종되어선 안됩니다. 목회자의 특성에 따른 목회 방식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정신과 법도가 중심이 되는 목회가 아닌 것은 바른 목회가 아닙니다. 누가 목회를 한다면, 그건 그리스도의 목회여야 합니다. 주님의 양 떼를 치는 목양사역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목회는 적어도 성경적인 목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목회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시는 목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목회 철학과 사역 방식이 주도적으로 반영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 목회의 실제 현장에서도 주님 자신이 직접 사역을 해 나가시길 요청하면서 그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목회는 사람이 하는 것이란 생각을 해선 안됩니다. 목회는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목회자는 그 분을 섬기며, 그 분의 뜻을 따라 사역하는 '종'(일꾼)입니다. 주님의 종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 마땅한 존귀와 영예를 그 자신이 사람으로부터 받고자 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낮아지고 겸손히 섬기며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얻으시도록 사역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목회자 자신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보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거나 사람들의 인기와 존경을 획득하려 한다면, 오히려 참된 권위도 잃고, 교회사역도 실패와 많은 상처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단이 딴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예를 사람이 가로채는 것이 이단입니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왕, 제사장, 선지자)은 그리스도의 목회를 이해하고 규정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구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왕으로서의 목회사역을 하셨습니까? 또 어떻게 제사장과 선지자로서의 목회를 하셨는지 복음서에서 찾아보도록 합니다. (내용이 조금 많기 때문에 이번 호에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왕직에 대해 살펴보고 다음 호에 제사장과 선지자직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그리고 독자께서 복음서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안다고 전제하고 성구표기는 생략하겠습니다. 그 대신 이 부분은 토의문제로 처리했습니다.)

 

가. 그리스도의 왕 되심과 그의 나라 세우기

 

하나.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이 나라의 주님으로 불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우리에게 계신, 유일하신 왕으로 섬깁니다. 정치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그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는 왕이 되십니다. 그 모든 부분을 지배하고 통솔하는 분이며 이끌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왕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최우선적인 사역입니다. 그것이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생각할 때, 예배와 교육(양육)과 전도 등으로 전문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긴 하지만, 우선 중요한 것은 그 목회의 내용,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의 왕권이 실행되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예배는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의 왕권을 선포하며 존귀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예배를 통해 왕을 알현하며 왕의 뜻이 전달됩니다. 교육(양육)은 신자들의 삶의 실제적인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세워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아직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지 않아, 왕이신 그리스도를 반역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과 삶에 그리스도의 왕 되심이 있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구제와 사회봉사는 그리스도의 왕권과 그 통치행위로서의 사역을 교회를 통해 세상에 실현하고 적용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과 주권이 모든 목회 사역의 핵심에 자리 잡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나라, 영원한 나라, 가장 힘 있고 존귀한 나라의 왕이십니다. 다른 나라는 다 무너질 것이나, 이 나라는 영원히 설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권위와 힘은 풀의 꽃처럼 시들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원합니다. 누구도 그 권세를 넘볼 수 없습니다. 모든 목회 행위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둘. 왕과 그의 나라


처음부터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오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그 분은 이 나라의 주로 오셨기 때문에, 자신의 권위와 권세를 특별히 부각시키셨습니다. 왕으로 오신 그분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서는 그 나라의 주권이 세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서도 그는 자신이 왕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와 다른 것이긴 하지만, 그는 새롭게 임하는, 영원한 나라의 왕이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이렇게 왕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주인과 그리스도가 되심을 가르치셨고 도마가 그 분을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알게 된 사실은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 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승천하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진 존재, 즉 하늘과 땅의 왕이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는 분명 영원한 왕이셨습니다.

그는 직접 자신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아들, 주와 그리스도임을 드러내심으로 자신의 왕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으며 주님 자신만이 생명이 되심을 밝히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음을 밝힘으로써 모든 이들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드러내셨습니다. 참으로 그는 영원한, 그리고 유일하신 왕이십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 분을 진정한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이것을 잊으면 반역이 됩니다.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그 자신과 제자들의 증거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그의 왕 됨을 증거했고 왕으로서의 권세와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말씀은 한 나라를 세우는 왕의 말씀이셨습니다. 특히 그의 부활은 예수께서 생명을 가진 모든 이들의 주와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왕 되심을 부각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의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그를 왕으로 섬기는 이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귀속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홍보의 차원이 아니라,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한 복된 소식의 선포였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부르는 왕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를 왕으로 모시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구성합니다. 그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인정되는 곳이며 그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곳입니다. 주님은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셨고 이 나라는 그때부터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그 영역이 계속 확대해 갈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서 영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왕권이 펼쳐지는 모든 곳은 그의 나라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그의 나라가 가장 확실히 드러나는 곳이며 그의 나라의 세움과 확장을 위해 존재합니다.

 

셋. 왕의 다스리심


한 나라의 왕은 그 나라의 백성을 선하게 다스리며, 그 나라를 참으로 좋은 나라가 되도록 이끄는 의무도 함께 가집니다. 다스림을 제대로 하지 않고선 왕의 길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와 백성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다스리며 어디로 이끌어야 하는가'를 바로 알아 행하는 것이 왕의 직무입니다. 그런 왕이 아닌 자는 폭군이나 무능한 지도자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는 헌신된 지도자이셨습니다. 그의 백성들을 선한 길로 이끌고 그에게 속한 자를 끝까지 사랑하고 돌보셨습니다. 백성들의 연약함을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 분의 다스림 안에서 사람들은 행복했습니다. 그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달라서 가진 것마저 빼앗아 가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복과 은혜가 한없이 주어지는 나라였습니다. 백성이 아플 때 치유를 행하셨고, 배고플 때 먹이셨고, 길을 잃고 헤맬 때 선한 길로 이끄는 일을 주님은 하셨습니다.

한 나라의 왕은 백성을 보호해야 합니다. 백성들이 악한 자들로부터 수탈과 착취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돌봄이 없는 나라는 쓰러져 가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시의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백성들의 영혼을 탈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죄악을 공개하며 그들로부터 백성들을 격리시키는 일도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경계를 세우는 시도였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를 따르는 백성들을 사탄과 죽음의 공격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의 인기에 급급하는 왕이 아니셨습니다. 대중들의 칭찬과 환호에 으쓱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보다는 참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많은 백성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까지 드리는 진정한 왕이셨습니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정략적인 협의를 하여 세상의 나라를 세우는 것과 그 나라의 왕으로 세움 받는 길을 거절하셨고, 철저히 하나님의 원리에 의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길 원하셨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사는 길을 행하셨습니다. 왕으로서 권위를 사람들이 인정하거나 하지 않거나 상관없이, 그는 왕이셨기 때문에 늘 당당하셨고, 그의 나라를 세우려는 그 분의 계획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첫 번째 백성들입니다. 그는 그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본래 그의 백성이 아닌 자였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의 제자들 모두는 그 분의 돌봄과 은혜를 조건 없이 받았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왕이셨고 주님이셨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려지지 않도록 그의 손 안에 계속 보호받았고 그들을 직접 돌보는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참된 왕이 누구신지 알고 난 이후로는 그 어떤 핍박이나 죽음에 굴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왕이신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의 백성인 그들은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받는 이들은 이런 당당한 믿음을 가집니다. 교회는 이런 이들을 배출해야 합니다.

 

넷. 법의 선포와 시행


한 나라를 세우려면 법을 제정하고 그 법대로 살도록 이끄는 법실행의 체계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그 나라를 든든히 세워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분은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스도 나라의 규율을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법은 문자적인 의미보다도, 그 말씀의 정신과 원리를 지켜 행하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구약의 말씀을 본래의 원리와 정신에 비추어 제자들에게 다시 해석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의 말씀도 이 원리에 비춰 준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법은 효과적으로 전해졌고 그의 나라는 이 법을 근거로 하여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으시는 주님의 왕 되심이 실현되는 길은 그의 나라의 법도인 말씀이 제대로 드러나고 그 말씀을 근거로 하여 운영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왜곡되거나, 말씀이 제한적으로 가르쳐질 때, 또는 그 말씀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을 때, 그리스도의 왕권이 훼손되는 것이며, 그의 통치 이념이 제대로 준행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법은 세상의 법과 달랐습니다. 세속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를 구분하는 기준이 주어집니다. 그의 나라는 사랑과 은혜와 섬김이 강조되는 나라입니다. 용서와 구속과 이해와 용납이 통용되는 나라입니다. 인내와 소망과 믿음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그 어느 나라도 이런 나라는 없었습니다.

이 나라의 왕이신 주님은 그가 가르치신 이 모든 말씀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제외하지 말고 모두 가르쳐 지킬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 분의 말씀 중에 그 어느 것 하나 빼놓고 가르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그 분이 가르치셨던 말씀의 본래의 의미가 바르게 해석되는 나라일 뿐 아니라, 그 말씀의 정신과 의도에 따라 살아가도록 백성들을 이끄는 나라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의 왕권은 힘있게 세워집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런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다섯. 비전제시와 동기부여


한 나라의 지도자는 그 나라가 나아갈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비전이 없는 지도자는 한 나라를 다스릴 재목이 되지 못합니다. 이 말은 그에게 맡겨진 나라(사회)가 지금 어느 상태에 있으며, 또 앞으로 어디로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분간하는 혜안과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그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지도자를 만난 백성은 불행합니다. 더 나아가 비전의 제시는 지도자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끝나선 안됩니다. 백성들이 이에 동의하고, 모두 함께 그 꿈을 향해 나가도록, 적절한 동기를 부여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꿈입니다. 그의 나라는 굳게 설 것입니다. 초기에는 비록 겨자씨만 하지만 결국은 창대해질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귀한 보석과 같아서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날, 그의 나라가 임하게 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어야 하며,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해야 하는지 설명하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그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결국 그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설명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비록 보이는 나라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영히 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온전히 회복되어질 것입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자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그 나라의 비전을 제시하셨고 그들로 이 나라에 헌신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생명의 말씀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주님을 죽기까지 따르며 그리스도의 비전에 함께 헌신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이 능력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여섯. 보상과 징계


한 나라의 왕은 백성들을 이끌 때, 적절한 상벌을 시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나라를 세워가는 데 협력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벌과 상은 효과적으로 백성들을 이끄는 방법입니다. 나라는 왕 혼자서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많은 내용이 이 보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잘한 자에게는 상이, 못한 자에게는 벌이 주어집니다. 그 나라에 선하고 충성된 자에게는 잘했다는 칭찬과 상급이, 그 나라에서 악하고 게을러, 해를 주는 자에게는 책망과 채찍이 주어집니다. 심지어 지도자의 직분을 가졌으면서도 제대로 백성들을 이끌지 못하는 이들은 주님의 저주를 받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잘 섬긴 자에게는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놀라운 영광을 누리게 하십니다.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것을 중요시하며, 받은 바 달란트와 므나로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그의 나라와 의에 헌신할 것을 모든 이들에게 요구하십니다.

그 날에 보상과 보응이 완전히 주어질 것입니다. 그 날은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왕으로서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 날에 이제까지의 모든 행위는 심판 받을 것이며 이에 따라 책망과 칭찬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공의가 서 있는 나라입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눈가림과 인간적 술수나 속임이 통하지 않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일곱. 인격과 에토스


지도자의 인격을 갖추지 못한 이를 백성들은 마음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지도자의 인격과 도덕적 자질이 일반인보다 낮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법을 제시하는 자는 법의 기준보다 낮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선 법을 세워갈 수 없습니다. 인격이 따르지 않는 지도자는 존경을 받을 수 없고, 그 말에 에토스를 세울 수 없으므로 마음으로 그 말을 따르는 자가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스승으로서 최고의 인격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말과 행위가 완벽하게 일치하셨고 거짓이 없으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그 어떤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라 해도 기꺼이 따르고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말씀과 삶이 참 진리인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많은 이들이 주님을 오해했고 때론 비방하기도 했으나, 그의 제자들이 그럴 수 없었던 것은 그분과 함께 지내는 생활 동안 내내 보았던 그의 흠 없고 점 없는 삶과 온전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는 노력과 자성, 그리고 그분의 길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헌신보다 목회자의 에토스를 세워주는 길은 없습니다.

 

여덟. 훈련과 양육, 일꾼의 양성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는 백성들이 한시적으로 잘 먹고 잘 살도록 하는 데 통치의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그 보다는 그 나라가 지속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긴 안목을 가지고 사역에 임해야 합니다. 나라를 굳게 세우기 위해선 그 나라의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집행할 일꾼들을 발굴하고, 훈련시켜 세우며, 적절히 업무를 분장하고 위임하여 그 일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또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구성원들로 자신들이 본래 가진, 또 훈련된 능력들을 발휘하여 함께 그 나라를 세우고 굳게 하는 일에 총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무척 중요합니다.

이 말은 모든 백성이 그들에게 적합한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능력에 따라, 은사에 따라 나라를 돕는 일에 배치되어야 한다는 뜻이며, 이를 통해 가급적 모두 함께, 나라 세우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잘 하는 지도자가 지도력이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속한 자들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그의 나라의 일꾼들을 뽑아 훈련하고, 그들이 성장하게 하는 일에 주력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세상의 나라와 어떻게 다른지 많은 말씀으로 가르치셨고, 그 나라에 헌신된 지도자들이 될 사람들을 선발해서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선발된 제자들은 그의 양육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왜 헌신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섬길 것인가 등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본으로 그 삶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나가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실현하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가롯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은 그들의 왕이신 주님과 그의 나라의 사역을 위해 헌신하다가 고난을 받으며 순교를 당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다스림이 이 땅에 실현되는 일을 위해 헌신한 이들이었습니다. 주와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일을 위해 목숨을 드린 이들을 통해 이 땅에 교회는 세워졌고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력을 얻어갔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이 땅에 세우는 헌신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주권과 왕권이 세워졌습니다.

어떻게 가르쳤길래 또 어떻게 이끌었길래 목숨을 다하여 헌신하는 제자들을 길러냈을까 하는 겁니다. 그의 지도력의 비밀을 사람들은 알고 싶어합니다. 실제로 많은 지도자들이 주님으로부터 이것을 배웁니다. 어떻게 사람들을 이끌어 그리스도의 비전을 따르게 하며 그 제자들로 어떻게 그가 제시한 비전에 헌신하게 만드는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또한 평범해 보이는 이들을 훈련시켜 어떻게 최고 수준의 능력 있는 지도자로 만들 수 있는가도 관심사가 됩니다. 제자훈련은 바로 이런 사역입니다.


나. 그리스도의 왕권이 실현되는 목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왕권이 인정되는 목회라 할 수 있습니까? 과연 그리스도의 왕권이 실현되는 목회란 무엇입니까? 적어도 여덟 가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나. 만사에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거론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의 왕 되심을 반영하는 사역을 실제로 하고 있는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사람이 영광을 받지 않도록 합시다. 자신에게 영광이 돌려지는 것 같을 때마다 스스로 돌아보고 왕이신 그리스도께 합당한 영광이 돌려지고 있는지를 점검합시다. 그것은 꼭,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를 받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그리스도께만 영광과 존귀를!'이라는 구호를 외쳐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 지도자 개인(그룹)이 늘, 모든 목회의 내용과 결과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왕권을 실현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사역들인지를, 기도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목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 왕이신 그리스도를 구하라.


주님의 사역을 요청하십시다. 목회는 그리스도의 목회이므로, 그리스도 자신이 왕으로서, 주님으로서 그분의 목회를 하시도록 구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 그의 사역을 하십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직접 하시든, 사람을 통해서 하시든, 왕이신 그리스도를 구하며 그 분께서 사역하시도록 겸허히 간청하는 것처럼 목회자 자신이 온전히 목회 사역에서 왕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행위는 없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를 부르십시오. 주님께서 그의 사역을 하실 것입니다.

 

셋. 그의 왕 되심을 가르치고 적용하라.


그리스도가 왕과 주님이 되심(kingship and lordship)을 자주 가르치며, 어떻게 하면 모든 사역과 생활 가운데 그것이 실현되도록 할 것인지 점검하는 시간들을 교회적으로 자주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를 가르치고 그것을 적용하게 하는 일은 실제적인 일입니다.

넷. 그리스도의 법도가 서게 하라.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분의 의도가 철저하게 교회의 사역과 성도들의 개별적인 삶 속에 심겨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법도가 모든 사역과 생활 속에 부각되고 지켜지며 존중되어야 합니다. 한두 가지 말씀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를 율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정신을 늘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법을 남(특히 연약한 자)을 판단하는 도구로 삼는 것은 안됩니다. 그 보다는 목회자와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늘 자신들을 돌아보며 그 말씀들을 겸허히 따르려는, 본을 보이는 목회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법은 세워집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과 정죄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서로에 대한 격려와 위로가 있는 교회 문화를 말합니다.

 

다섯. 교회가 작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하라.


교회는 작은 단위의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어야 합니다. 개 교회를 하나의 좋은 나라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나라가 되도록 합시다.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되는 나라란 어떤 나라입니까? 나라의 백성인 성도들이 왕이신 그리스도의 돌봄과 보호를 받으며, 그의 보좌 앞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와 평강에 적셔지는 그런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이 제대로 가르쳐지며 이 말씀에 근거하여 나라의 법도가 세워지며, 이 법도의 실현을 통해 모두가 성숙한 백성이 되는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러려면 목회는 어떤 철학과 방향을 가져야 합니까? 이를 위해 교회는 어떤 목회 시스템을 가동해야 합니까?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싶습니다. 속고 속이는 정략적인 세상의 나라와 다른 나라가 교회를 통해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의 성(城)이며 작은 나라입니다. 이곳의 지도자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실현되도록 애써야 하며 그리스도의 나라 정신이 그 안에 세워지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며 축복 받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반석이 되시며, 선한 목자가 되시며, 왕이 되셔서 이끄시는 그런 나라를 구합니다. 목회는 그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여섯. 모든 조직에 그 분이 왕이 되시게 하라.


그리스도의 왕권이 전체적인 목회와 성도 개개인의 삶 속에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모든 조직(당회, 제직회, 선교회, 주일학교 부서, 성가대, 구역이나 셀 등의 모든 조직)과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 속에 그의 왕권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작은 단위의 모임이라 할지라도 그 모임의 주인이 그리스도가 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이 실현되는 모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이 실현되는 목회는 목회자 개인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성원 모두 같은 이해와 헌신을 소유함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목회가 이뤄지면 얼마나 멋질 것입니까.

 

일곱. 전체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라.


그런데 개 교회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전체성이 약화되기 마련입니다. '자기 교회'만 보고 전체적인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목회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일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목회자와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기적인 교회사역을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모든 교회가 다 하나님의 나라의 지체임을 인정하고 서로 협력하며, 약한 교회들을 지원하고, 함께 전체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은 그리스도의 목회를 하려는 교회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목회가 실현되는 교회는 다른 교회에 대해 근본적으로 열린 교회입니다.

그 구성원들은 다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볼 때, 존경과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교회만이 최고라 생각하거나, 반대로 자신이 속한 교회를 경시하는 그런 닫힌 태도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 교회만이 최고라 여기는 교만한 교인들을 양성하는 교회가 있다면, 아무리 그 교회 안에 목회 시스템이 잘 돼 있다 해도, 실제로는 인간을 숭상하는 교회로 향해 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의 이름으로 일컫는 모든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이 가르쳐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체적인 안목 가운데 개 교회의 역할과 사역의 방향을 이해해야 합니다.

 

여덟. 사회 속에 그리스도의 왕권이 실현되도록 하라.


그리스도를 왕과 주님으로 인정하는 정신은 교회 안에서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고 적용됩니다.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사회의 구석구석에 그에게 충성된 신하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되며,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용사들을 보유하고 계신 것이 됩니다. 교회의 소속은 달라도 하나님 나라의 헌신된 멤버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현장에서 서로 지원하며 함께 연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아닙니까. 어떻게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인정되게 할 수 있습니까? 그의 나라가 그곳에 임하도록 하는 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목회는 교회에서 시작해서 사회의 전 영역으로까지 확대됩니다. 그의 나라는 각각의 교회에서 펼쳐지면서 동시에 전체적으로 진행됩니다. 개 교회는 하나의 작은 나라로 있으면서 전체적인 나라의 한 부분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이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나라를 강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확대해 나가십니다.

그리스도의 목회 가운데 가장 많이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사역입니다. 그분이 왕이 되셔서 그의 나라를 통치하며 섭정하시는 행위는 교회와 사회에서 온전히 드러나야 합니다.

신약목회의 기초는 그리스도가 왕이심을, 아니 그리스도만이 왕이 되심을 선포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목회는 이 사실을 기반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사역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와 왕이 되심이 인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목회의 전(全) 영역에서 그리스도께 왕권을 드리는 일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 외에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왕권을 대신 차지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서, 왕으로서의 주님께서 직접 사역하시는 목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목회2 : 제사장 - 선지자직

교회와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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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교수 / 평택대학교 신약학, 스텔렌보쉬대 신학대학원(Th.M, Th.D)

신약목회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왕건]과 같은 대하드라마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 같은 드라마를 보고 계시겠습니다만, 이를 볼 때 어떤 생각들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좋겠습니다. 한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왜 왕건이 궁예보다 더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되는가? 그런데 세속의 지도력(왕권과 정치)과 성경적 지도력은 어떻게 다른가? 세속의 정치가 해낼 수 없는 한계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그 해법의 대안을 보여 줄 수 있는가? 인간적인 술수와 모략 대신에 참다운 사랑과 섬김의 그리스도의 정신이 실행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의 모습을 띌 것인가?

대하드라마를 볼 때도 이처럼 성경적 사상으로 생각하며 본다면 의외로 적지 않은 통찰력을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왕건과 궁예와 견훤의 대결 그 자체보다도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이 훨씬 더 흥미롭게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과 하나님 나라의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외견상 중첩되는 것이 없지 않겠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부분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치 문화와 지도력, 사역 동기와 목표, 그리고 사역 내용도 확연히 다릅니다. 교회가 사회 문화와 정신에 도전을 주며 좋은 공동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도리어 사회의 정치 문화에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은 지극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적인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지만 그 정신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개인은 교회와 사회, 어디에서나 성경적인 정신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그 운영과 목회 사역 등에서 성경적인 정신과 문화를 나타내야 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 문화가 세속 문화에 도전을 주고 대안을 제시합니다. 살아 있는 교회들이 그렇게 해왔습니다(세상에 대안을 제시할 목회철학이 어떤 것인지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목회 사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삼중직 중에서 제사장직과 선지자직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주님의 삼중직 중, 왕직과 선지자직은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주님 자신이 언급하신 반면 제사장직에 대해서는 별 다른 말씀이 없으셨던 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그분이 왕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다는 등,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시는 여러 부분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지난 번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정하신 때가 될 때까지는 자신이 진정 누구신지 밝히는 것을 허락치 않으셨지만 십자가의 현장이 다가올 때와 그분이 부활하신 이후에는, 자신의 하나님 되심, 그 나라의 왕과 온 세상의 주가 되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자신의 왕권과 주재권이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그의 신분과 역할은 분명히 공개적인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왕되심을 거절하는 이들로 인해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입니다. 부활은 그의 왕되심을 인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 자신의 선지자적 사역과 역할도 어느 정도는 시인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선지자에 빗대어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눅4:24; 마13:57)는 말씀을 나사렛에서 했을 뿐 아니라, 제자를 보내시며 하신 말씀 가운데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심(마10:40,41)도 자신을 선지자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그분을 큰 선지자로 여겼던 것을 복음서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눅7:16; 막14:16; 마16:5; 21:11, 46 등).

반면에 주님께서 또한 제사장으로도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복음서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 사상은 후에 히브리서에서 특별하게 나타나는 것이긴 한데(로마서 8장과 요한일서 2장 등에서 추론할 수 있는 사상이기도 합니다), 복음서에선 왕직과 선지자직의 경우처럼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삼중직 중에 제사장직은 주님께 적합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히브리서 기자는 잘못을 범한 것이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관점이 맞다면, 주님 자신도 자신의 제사장(대제사장)직을 알고 계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시대를 역행(복음서 상황이 히브리서 시점 보다 이전의 것이기 때문에)해서 추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에게 영감을 주신 성령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주님 자신도 제사장과 관련된 직무를 깨닫고 계셨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자신의 제사장직과 관련해서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첫째, 이미 세상에 제사장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자신이 그들 제사장과 구별된 다른 제사장이 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그들처럼 그 당시의 제사장 직무를 하기에는 적절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 자신 제사장의 혈통으로는 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아론보다 더 이전의 인물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나셨다는 점을 분명히 했던 것(히5:6, 10)일 겁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율법을 좇아 제물을 드리는'(히8:4) 일에 매이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둘째,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의 구성원이었던 '대제사장들'의 지시와 통솔을 받는 제사장 또는 그들 대제사장의 반열에 설 의도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 대제사장들은 주님과 사사건건 대립되는 적대자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주님을 음해하고 제거하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판국에 주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표면적으로 드러내 강조하는 것이 적절치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셋째, 주님은 (대)제사장이라는 호칭이나 외적 모습은 취하지 않으시면서 도리어 그의 사역을 통해 진정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임무와 기능을 수행하심으로 자신의 제사장 되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신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본래의 제사장직의 바른 회복이며, 인간 제사장의 직무의 한계를 뛰어넘는 완전한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이신 것입니다.

제사장 직무
제사장의 직무는 제사 관련 직무, 성막(성전) 관련 직무, 율법 교훈과 관련 직무, 구제 및 환자 관련 직무 등, 주로 네 가지가 주요 직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 관련 직무
우선 제사 관련 임무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늘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직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사는 속죄 또는 사죄의 의미와 함께 헌신, 그리고 화해와 평화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구약성경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죄를 씻고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맺게 해줄 뿐 아니라, 때로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과 결단을 하게 하는 특별한 의미가 제사에 담겨 있습니다.

왜 어린양과 같은 짐승의 각을 뜨고 피를 모두 뿌리며 그것들을 취해 불살라 제사 드리게 하셨습니까? 왜 곡식 등과 같은 제물을 드릴 때도 그것들을 소각하게 하셨습니까? 결국 속죄와 평화는 그 어떤 핏값의 지불 없이 얻어지지 않으며, 또 소각 등과 같은 과정을 통해 헌신이란, 이처럼 자신을 온전히 불살라 드리는 것과 같다는 점이 강조된 것이라 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바로 그 자신을 속죄물로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제사직의 임무를 수행하셨습니다. 처음부터 그분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뿌려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 죽음과 부활의 때를 기다리며 사역하셨던 것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몇 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예고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처럼 '많은 사람의 대속물'(막 10:45)로 죽으시기 위해 오셨다면, 그 자체로 제사직과 관련된 그의 직무를 감당하시는 분이셨음을 스스로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 제사장은 백성들이 가져온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신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할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이 직접 제사 희생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사람들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그 제사는 단번에 영원히 드린 제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의 죽으심의 의미는 그의 제사장직의 수행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이 일에 완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가로막힌 담을 제거하셨고 평화의 관계로 만드셨습니다. 이젠 제사를 다시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드려진 영원한 제물이신 주님을 통해 하나님께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헌신의 의미와 관련해서도 그의 죽으심 이상의 헌신과 순종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헌신과 섬김의 본이 되십니다. 특히 그 헌신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대신하여 드려진 완전한 헌신이셨습니다.

제사장 직무의 첫번째가 속죄와 헌신, 그로 인한 화해와 평화이기 때문에 이 부분이 그리스도의 목회를 하려는 교회 사역에 우선해서 반영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말은 목회가 각 사람을, 그리고 전 회중을, 또한 지역의 모든 이들까지도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를 갖게 해야 한다는 목표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참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 사역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특히 주님의 구속과 그의 헌신과 화해의 공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까지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목회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얻고 그분께 헌신하도록 하는 일이 제대로 되고 있습니까? 서로의 교제와 사귐에 그리스도의 구속과 헌신과 평화의 정신이 제대로 반영되고 있습니까? 이 일이 성도 각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전 회중에게로 그리고 지역과 사회로 펼쳐나가는 복음의 운동력이 되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성전 관련 직무
두번째로 성막 또는 성전과 관련된 직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담당해야 했던 또 다른 일은 성막과 성전을 관리하며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그 중 지성소는 1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속죄의 제사를 드린 후에야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성소와의 사이에 굵은 커튼으로 구별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놀라운 일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했던 이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으신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너무도 중요한 사건이었고 공관복음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7:51; 막15:38; 눅23:45). 이젠 주님 자신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셨습니다. 사람은 그분을 통해 언제든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주제는 좀 더 근원적인 고찰이 필요합니다. 성막과 성전이 존재했던 의의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과의 만남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이 이스라엘의 회중 가운데 존재했을 때,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하고 계신다는 것을 뜻했고 비록 대제사장과 같은 특정인을 의지해서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이들에게 무척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지어졌을 때도 그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모든 남자는 일년에 최소한 세 차례씩은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유다로 나누어지자 그 기능이 약화되기 시작했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나아갈 수 없던 이스라엘부터 타락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몰락하고 말았고 유다도 그 뒤를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젠 새로운 성전이 필요했습니다. 예전 물질로 세워졌던 그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세워진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가 필요했습니다.

주님 자신이 성전으로 오셨습니다(요1:14; 2:21). 주님은 옛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막14:58)을 새로 짓겠다고 누차 말씀하신 것 때문에 사람들은 그 말을 기억하고 후에 고소의 변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성전이셨고 성전으로서의 그의 임무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임재라는 측면에서 '임마누엘'(마1:23)이라는 주님의 이름은 주님의 성전 되심을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 우린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교회 안에 머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육성하여 그의 몸된 교회를 세우게 하신 것은 그가 승천하신 후 교회로 주님을 대신해서 이 땅에서 그의 몸,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참고 고전 3:16; 엡 2:21). 이젠 (건물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뵙니다. 주님은 이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목회의 중요한 목표는 이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며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만남과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처소는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 역할과 사명을 잘 알고 있습니까? 주님 안에서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며 그의 임재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일이 제대로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분의 임재와 만남 때문에 지역과 사회에 큰복이 되고 있습니까?

율법 관련 직무
제사장의 세번째 직무는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위급한 때는 선지자들이 주로 그 역할을 맡았지만 평상의 때에는 이 일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역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에 랍비라는 제도(주전 2세기 말경부터)가 생겨났지만 그전에는 주로 제사장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학사 또는 서기관이라는 직능도 주로 바벨론 포로 이후에 등장합니다. 제사장들이 율법을 잘 가르칠 때 그 나라는 쉽게 침략을 당하지 않는 강한 나라가 되기도 했습니다(참고, 대하17:7-19).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통해 백성들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분이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율법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지 않으셨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마5:17). 오히려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를 보다 정확히 해설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역 가운데 가르치는 일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가르치십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이 목회에서 중요한 이유는 당연합니다.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 잘하는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는 주님이 가르치시길 원하셨던 모든 말씀을 체계적으로 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는 또한 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엡 4:11).

(이와 관련된 부분은 뒤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의 부분과 다소 중복이 되기 때문에 그 부분에 가서 더 거론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제와 자선의 직무
네번째로 연약한 자와 환자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제사장들이 이들 약한 자들을 직접 돌봐야 하는 책임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런 이들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환자들(특히 나병)의 치유 여부를 제사장들이 판별하게 했다는 점(예컨대 레14장; 마8:4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매 삼 년마다의 십일조의 경우에는 분깃이 없는 레위인들과 함께 가난하고 없는 자들(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그 혜택을 얻도록 했는데(신14:22-28, 26:12-13; 비교 민18:21-32), 이 때 비록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가난한 자의 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깃의 문제로 인해 그런 이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정해진 분깃이 없어 십일조 등 백성들의 헌물로 생활해야 하는 제사장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없어 도움을 받아 살아야 하는 연약한 자들의 상황과 처지를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평소에 늘 이런 자들을 위해 많은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복음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양과 염소에 대한 말씀(25:31-46)을 하실 때, 마가복음에서 재물이 많은 한 사람에게 하늘의 보화를 약속하시면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10:21)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바로 이런 시각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부자에 대한 두 가지 경계의 말씀(12:16-21; 19-31)은 유명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25-37)로 너무도 잘 알려진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라는 말씀도 이 복음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연약한 자를 눈여겨 보셨고 그 연약함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지상의 모든 병자를 찾아 다니신 것도 아니고 지상의 모든 가난한 자를 찾아 구제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도중에 만난 이들을 긍휼히 여기셨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시는데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그에게 나아오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가시던 자리에서 머물러 서서 그를 고쳐주셨습니다(막10:46-52). 이런 일은 복음서 어느 부분에서든 쉽게 찾을 수 있는 기록들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특성이었습니다.

인간 제사장은 연약한 자들을 돕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주님의 마음과 같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주님은 다르셨습니다. 본래 그는 체휼의 주님이시지 않습니까?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부터 낮고 낮은 벌레 같은 우리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시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분이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치고 돌보신 일을 하셨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전부터 구제와 자선의 선한 사업을 해왔던 것입니다.

이 사업이 교회의 모든 사역일 수는 없지만 주님의 제사장직을 잘 드러내는 사역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목회를 생각할 때는, 교회 안팎의 연약한 자들에 대한 목회적 관심과 사역도 함께 구상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역이 주님의 체휼에서 시작하듯, 교회도 주위의 아픔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작년(2000년) 민간 부분 대북 지원액 420억원 중에서 기독교계의 지원이 270억을 차지한 일(기독신문 2001.1.17)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사회와 이웃에 보인 헌신의 한 예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는 너무 교회 단위의 사업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헌금이 교회로 집중되기 때문에 개개인의 단위로 선한 사업을 하는 일이 취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적으로 함께 하는 일과 한 사람씩 개인적으로 은밀히 하는 일이 함께 되어야 사회 구석 구석에 소금 된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복음의 영향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대적자로서의 (대)제사장들
주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대제사장 그룹과 빈번히 부닥치셨던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이 주님으로부터 배운 본질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굳어지고 말면, 그래서 본래의 성경적인 의도와 동떨어진 상태로 변질돼 버린다면, 참으로 개혁이 필요한 때가 됩니다.

앞의 네 가지 제사장 직무들 모두에서 주님과 당시의 제사장 그룹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번째의 제사 직무의 목적은 속죄를 통한 하나님과 사람의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지만 당시의 제사장, 특히 대제사장들의 관심은 이런 부분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물질이나 칭찬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부패된 모습은 변화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성전과 관련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좌판을 뒤집어 엎으시며 성전에서 주님께 나아오는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신 것(마21:12-15)은 성전 시스템에 안주하고 있던 당시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그룹에 대한 주님의 분노를 표현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성전 본래의 존재 의의였던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과의 만남이라는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건물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전 제도는 바뀌어야 했습니다.

말씀의 직무는 어떠했습니까? 랍비라 이름 듣는 것을 좋아했지만 장로의 유전들 하나 하나를 지키는 데만 급급했을 뿐 율법의 정신을 새겨 지키게 하는 일은 등한히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새롭게 가르쳐야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새로운 교훈들은 그들의 것과 달라 서로 많이 부닥쳤던 것입니다.

네번째 직무인 가난한 자들에 대한 섬김도 그들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의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기존의 제사장 그룹을 지칭하는 것에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는 일에 관심이 많고(마23:5-8) 성전 존재 자체보다는 성전의 금장식(마 23:16)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어떻게 약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이들 그룹을 '의와 인과 신을 버린 자들'(마 23:23),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자들'(마 23:24, 별거 아닌 것에 신경을 쓰면서 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라 단정하셨습니다. 자신들의 본래적 직무 보다는 정치적, 종교적 파워의 획득과 유지에 훨씬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이들에 대해 주님은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교회가 조심해야 할 부분들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파워가 커질 때 소홀히 하기 쉬운 부분이 어떤 것들일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 교회는 실제적으로 제사장의 직무를 다하고 있습니까?

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세번째 직무는 선지자직입니다. 일반적으로 선지자는 제사장보다 훨씬 개혁적인 성향을 띕니다. 하나님으로 보냄 받은 선지자들은 주로 사회와 국가, 종교 각 분야에 혁신적인 말씀을 선포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학사들이 주로 율법을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가르쳤던 반면, 선지자들은 그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말씀을 주곤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직무는 무척 중요합니다. 그는 그 시대를 바꿔 놓는, 아니 모든 시대를 혁신시키는, 실로 놀라운 메시지를 전하는 위로부터 보냄 받은 선지자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이 선지자적 사명이 있음을 인식하고 계셨음을 앞서 살펴 본 바 있습니다. '오늘 내일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는 말씀에서도 선지자로서의 이러한 인식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 선지자와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그 어떤 선지자 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셨습니다(마 13:17). 주님은 세례 요한을 마지막 선지자로 여기지 않으셨습니까?(마 11:9; 눅 1:76, 16:16).

그렇지만 주님도 이 선지자직의 임무를 이 땅에서 가지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다만, 인간 선지자와 구별되어야 마땅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말씀이신 하나님, 바로 그 분이셨기 때문입니다(요 1:1). 그래서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말씀을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단정하여 말씀하실 수 있었고(마 22:35-40) 또한 그 같은 내용을 권위 있게 승인하실 수 있는(눅 10:25-28) 권한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주님께서 한 번은 포도원 비유를 드시면서 이제까지의 선지자들을 종으로 자신을 아들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마 21:33-41). 이제까지 구약의 선지자들을 그 땅에 보내셨던 바로 그 주님이심(마 24:34, 37)을 밝히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통해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말씀이 다시 새롭게 해석되어져야 했습니다. 그 동안 오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고 뒤틀린 해석과 말씀의 가려진 의미들이 바로 드러나야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주어졌던 말씀과 있었던 일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빛으로 재해석되고 재조명되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행함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을 주셨던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밝혀졌던 것입니다.

가르침의 권세
주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가르침의 권세가 당시의 가르치는 다른 이들과 달랐습니다(마 7:29; 막 1:22; 눅 4:32). 그것은 그가 진리 자체이셨고 말씀(로고스) 자체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르침의 권세가 달랐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이 분명했으며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내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말씀의 도전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내용의 초점이 불분명하며 대상을 폐부로부터 바꾸어놓을 수 없는 메시지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제대로 전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르침의 내용과 주제
둘째로 주님은 가르침의 내용과 주제가 특별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가르칠 때 다른 이들과 너무 다를 수밖에 없었고 왕이신 그분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윤리는 차별화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교회가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게 됐습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이 주님의 의도를 따라 제대로 가르쳐져야 합니다. 그의 교회는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셨던 말씀은 오늘도 상당히 혁신적인 것입니다. 그 말씀을 따르고자 할 때 우리의 변화는 불가피합니다. 그대로 갈 수는 없습니다.

대상에 따른 가르침
셋째, 주님은 대상에 따라 가르침의 내용과 수준을 달리 하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그는 대중과 제자들을 차별화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그의 대적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는 또 다르게 대응하셨습니다. 무리들에게는 주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반면, 제자들에겐 따로 그 내용을 해석해 주셨습니다(예컨대, 마 13:10-15, 34-43). 그래서 제자들은 더 깊은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날에도 제한된 그룹에만 특정한 것을 따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앞의 마태복음 28:20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이제는 주님께서 가르치셨던 '모든 말씀'이 '모든 이'에게 전달되어야만 한다는 말씀으로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대상을 차별화하셨던 교육방식이 어떤 결과를 내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특별한 관심과 대우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었고 그 결과 이들은 후에 교회를 세우는 기둥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훈련의 방법입니다.

가르치는 자의 삶과 본
넷째, 그 당시의 가르치는 자들과의 큰 차이는 주님은 자신이 가르치신 대로 사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이 그의 가르침과 동일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말씀이 듣는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데에는 주님 자신의 삶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도 주님의 가르침과 삶을 서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사셨는가를 알려면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가를 찾으면 됩니다. 그분이 가르치셨던 사랑과 용서, 믿음과 소망, 그리고 희생과 섬김은 모두 그의 삶의 내용이었습니다. 가르치는 자가 그 가르침에 합당한 삶이 없다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예는 우리에게 너무도 많습니다.

늘 같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삶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제자들은 주님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들은 모두 주님의 길을 걷습니다. 제자훈련의 기초는 가르치는 자의 바른 삶입니다. 주님의 경우를 보면 제자훈련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본으로 가르치는 것 보다 더 강력한 교육은 없는 것입니다(참고, 요 13:14). 사랑과 긍휼의 본, 정직과 정의의 본, 섬김과 희생의 본, 또 하나님 사랑과 기도의 본, 이런 삶의 본들처럼 가르친 내용을 손에 잡히도록 해주는 교육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언행 중에 그 어느 것도 제자들을 위한 교육으로 쓰여지지 않은 것은 없었습니다.

가르치는 자의 열정
다섯째, 주님은 정말 열정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가르치는 일을 쉬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에 불타는 열심을 가지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며 영혼을 새롭게 하며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음을 복음서에서 봅니다. 그분이 행하신 많은 기적들과 관련해서 그 의미들을 새롭게 가르치실 때가 많았습니다(특히 요한복음에서 그런 예들을 많이 봅니다). 그분은 자연을 통해서나,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나, 그룹간의 대립이 있을 때나, 아니 그 어떤 일이 있을 때라도 늘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입각해서 열심히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가르침에 열정이 없는, 그래서 상대는 듣든지 말든지, 변화되든지 말든지, 생명을 얻든지 말든지 그다지 관심이 없는 그런 선생이 아니셨습니다. 심문을 당하는 고난의 현장에서 그를 부인하던 베드로를 '돌이켜' 응시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눅 22:61).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교육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로 하여금 무언가 중요한 것을 기억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교육의 생생한 열정을 봅니다.

가르치는 방법
여섯째, 주님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탁월한 선생님이셨습니다. 그의 교육은 창의적인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보고 들으신 모든 것이 교육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에는 꽃, 새, 겨자, 포도나무, 등대, 성전, 과부의 렙돈, 헤롯, 죽음, 이혼 등 많은 다양한 소재와 주제들이 그의 말씀에 등장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가르쳐졌습니다.

또한 그의 교육은 사람들의 마음과 뇌리에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가서 그 옷가에 손을 대어 치유함을 입었습니다(눅 8:43-48). 주님은 모른 척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의도적으로 여인을 찾아내 그녀로 하여금 믿음으로 인한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현장의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세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드러낸 귀한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의 교육은 이렇듯 인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었고 그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교육은 특별했고 그의 가르침은 창의적인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려는 일에는 이처럼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방법들을 계발하고 사용하는 일이 포함된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필요합니다. 자신은 뭔가를 애써 가르치긴 했다고 단지 자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자 한 그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에 대한 면밀한 평가와 그 다음 단계의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을 계발해야 합니다.

가르침의 지속성
일곱째, 주님의 가르침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부분은 메시지의 지속성입니다. 그의 가르침이 당대에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은 그분의 말씀 자체의 영원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님이 심혈을 기울이셨던 제자들에 대한 특별한 교육(훈련)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 교훈은 이어져 어느 시대에나 예수님의 동일한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는 동질의 제자 그룹이 생성되었습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의 가르치는 사역에 그치지 않고, 그의 훈련된 제자들을 통해 그의 사역이 지속되고 확대되는 데 큰 관심을 두고 계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주님의 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며 더 큰일도 해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요 14:12).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도 이미 제자들이 주님이 하신 것과 같은 전도 등의 사역을 하게 하신 바 있습니다(참고, 마 10:7; 막 3:14; 눅 10:1 등). 주님은 그 자신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 이 땅에서 사역을 감당하신 것처럼, 이제 그들을 세상에 보내 그들로 주님의 사역을 계속하게 하셨습니다(요 17:18, 20:21). 이렇게 그의 사역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 계승되었던 것입니다.

제자훈련의 목표는 이처럼 훈련을 받는 이들만 바로 서게 하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이 더 강성한 자가 되어서 다른 연약한 이들을 돌보며 양육할 수 있는 사역 리더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원리입니다.

가르침과 비전
마지막으로, '주와 선생'(요 13:13)이셨던 주님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땅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마 28:19; 참고, 막 16:15; 마 8:11; 눅 13:29).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당대에는 비록 겨자씨만한 것이었지만 반드시 큰 나무로 자랄 것이라고 강렬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 13:31-32).

주님께서 어린아이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셨던 것(예, 마 18:2-6, 19:13-15)도 이 꿈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 작은 아이들은 미래에 결코 작지 않을 것입니다. 비전을 가진 이들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며 구원 얻는 이들이 사방에서 나아오는 꿈을 가진 주님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전도와 선교를 명령하셨습니다.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복음 전파를 적극적으로 해 나갈 것을 제자들에게 강하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 훈련의 중요한 초점이 이 방향에 모여졌습니다. 그들을 훈련시키셨고 보내서 실습할 수 있게 하셨고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의 말씀은 본래 상당한 파워를 가지고 폭팔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 씨를 뿌리고 거둘 일꾼이 훈련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목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은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교회 안에서 직접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무를 하시도록 자리를 내드리는 일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이 일을 하고 계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우선으로 자리를 내드리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분을 시중들 뿐입니다. 주님 자신이 이 일에 주인이 되시도록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인간 목회자나 사역자는 참된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 외에는 안 된다는 고백과 그분에 대한 바른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자신의 사역이 각 사람에게 미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손을 놓고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목회의 사역에 주님이 주님 되시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혹시 사람이 중보의 자리에까지 서 있지 않는가 돌아보며 주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목회자의 할 일은 주님의 사역을 도와 최선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목회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목회 사역에 그리스도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무가 잘 드러나는지 평가해 보며 주님의 뜻을 따라 최선으로 교회 사역에 임해야 할 줄 압니다. 그런 교회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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