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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현상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그물처럼 짜여진 3차원의 시간개념 위에서 펼쳐지고, 복음이 제시하는 바 구속의 원리도 이에 병행하여 위의 세 시제를 망라합니다. 말하자면 칭의는 과거 <그때 거기에서> 시작되었고, 성화는 <지금 여기>에서 현재 진행형이며, 영화는 미래의 어느 때에 완성되리라는 믿음의 긴 순례입니다. 칭의가 시작이라면, 성화는 과정이며 영화는 결과요 최종 목적지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시간성을 꿰뚫고있는 연속적인 일련의 과정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이루어진 칭의와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영화 사이에는 늘 종말론적인 긴장이 흐르게 마련입니다. 


구원의 단초는 칭의이지만, 그 이후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기나긴 성화의 과정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따라서 칭의 없는 믿음은 맹목이며, 성화 없는 신앙은 허구이고, 영화 없는 구원은 실로 공허합니다. 생애에 나타나는 성령의 재창조 사역은 칭의의 사건이 과거에 있었음을 확인해줍니다. 칭의와 영화는 순간의 사건이지만, 성령과 함께하는 성화는 가히 일생의 과정이어서, 성령을 거스리는 삶은 성화의 기회와 함께 구원을 놓지고마는 명백한 이유가됩니다. 또한 구원의 진리는 오묘하게도 칭의를 실현하신 성자와 성화를 가능케하시는 성령 및 영화를 선언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그 역활분담 면에 있어서도 삼위일체적입니다. 


물론 칭의와 성화는 송두리채 십자가의 은혜와 의에 기인합니다. 우리로 의롭다 칭해주시는 의는 전가되는(imputed) 의이며, 우리를 성화되게 하는 의는 나누어주는(imparted) 의입니다. 칭의는 장차 우리로 하여금 하늘왕국에 들어가게할 그리스도의 피로 쓰여진 붉은 빛깔의 초청장이요, 성화는 하늘나라에 입성할 흰 빛깔의 예복이며 그 적합성입니다. 성화는 성령 안에서 신자들이 칭의의 선한 열매를 맺는 과정으로서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전 생애에 걸쳐 지속됩니다.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는 그래서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칭의를 얻은 자는 필연적으로 예외없이 성화를 수반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없는 믿음, 윤리가 포함되지 않은 믿음은 기복신앙에 불과하거나 미신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칭의 교리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구원을 이루려는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의 자력적 구원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복음의 고유한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 만이 가지시는 주권적인 은혜이므로, 인간의 정성으로 어느 정도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다분히 이교적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기독교 일반이 안고 있는 윤리적인 후퇴와 도덕적 쇠락은 불행하게도 칭의의 느슨한 이해와 맞물려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의 칭의론이 성경이 가르치는 심오하고 포괄적인 칭의의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입니다. 


아시다시피 루터가 죽음의 문턱을 서성이다가 어느 날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낯선 의>를 발견하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칭의를 발견한 것이 급기야는 종교개혁으로 까지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칭의론은 개신교회가 그 위에 당당히 서든가 아니면 걸려 넘어지든가하는 문지방과도 같은 교리가되었습니다. 루터의 칭의론은 로마 천주교의 믿음과 행위 구원론이 로마서에서 증언한 바울의 복음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고, <오직 믿음 만으로의 의>을 역설하면서 어거스틴 이래 중세 천 년 동안 상실된 기독교의 칭의 교리를 재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칭의는 우리가 실제로는 아직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 때문에 죄가 없다고 선언하는 법정적인 개념이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 통치를 받게 하는 언약론적이고 종말론적인 개념을 동시에 포함합니다. 칭의를 단지 의인이 되었다는 법정적·선언적 의미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관점으로도 보아야합니다. 현재적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 결정되어지나 최종심판 때 주어지는 칭의는 신자의 신앙적 삶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여,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구조 속에서 구원론을 이해하면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더욱 선명하게 이해할 수있습니다. 


칭의의 완전한 수확은 종말에 까지 유보되어 있기 때문에, 한번 칭의를 받은 자라도 거룩한 반응의 삶을 통해 그 칭의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면 최종적인 칭의에 들어가지 못하고 탈락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남깁니다. 칭의와 성화는 하나의 통합체로서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칭의는 <이미 이루어졌으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음>이라는 종말론적 구조 속에서, 믿는 자로서 약속은 이미 받았으나, 그 완전한 수확은 종말의 때 까지 유보되어있다는 사실 즉 칭의의 종말론적 긴장이 남아있습니다. 


1517년 종교개혁 이후 500여년 동안 개신교회가 하나의 제도로 자리잡기 시작하자 칭의론이 가진 이러한 종말론적 측면, 즉 모든 신자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엄숙한 진실은 서서히 불편해지고 퇴색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성화의 과정을 제쳐둔 오직 은혜(sola fide) 사상이 슬며시 들어와 죄를 뉘우치거나 죄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할 필요를 없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은혜 만의> 교리에서는 자신의 죄를 덮어줄 넉넉한 핑계와 숨겨줄 구멍을 얼마든지 쉽게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교개혁적 칭의론에 의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의 회복은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관계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주권의 이전 즉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게된 자이므로, 성화의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순종하며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칭의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반복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칭의를 선언한 자에게 다시 칭의를 확인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로 하여금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으라고 초청하십니다. 칼빈은 우리가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 칭의를 받았다고 까지 성화를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으로 칭의 그 자체가 획득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단계에만 머물지 않고 성화의 단계 속에서 칭의는 부단히 현재화합니다. 칭의를 그리스도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의 틀 안에서 이해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칭의는 일회적이며 선언적이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성화의 열매를 맺는 구원의 과정 안으로 들어가게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과정 안에서 칭의는 성화의 열매 속에서 늘 현재적입니다. 


단 일회적으로 주어진 칭의는 성화를 통하여 그 내용이 더욱 풍부해지며 종말에 가서 완성되나 그 질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화에 의하여 칭의의 내용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음으로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종말에 가서 칭의가 다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 주어진 칭의가 완성되고 재확인되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에서 난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전가된 의, 곧 선취적으로 주어진 처음의 의가 완성되고 재확인되는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칭의를 받은 자 곧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된 자는 자기가 속한 나라의 법을 준행합니다. 이리하여 천국 백성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칭의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순종>으로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바울의 요구는, 선한 목자의 제자가 되어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요구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상응합니다.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로 이전된 자이므로, <믿음의 순종>이 기대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선행은 참된 믿음을 보여주는 표지(mark) 내지 표징(sign)으로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선행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까닭은 그것이 온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임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구원을 성취하시는 의의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윤리적 요구를 늦추는 것을 암시하지 않고, 오히려 산상수훈이 보여주는 것처럼 윤리적 감각이 더 예리해짐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삶의 변화, 즉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성화를 이루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일하시지 않는 다는 증거입니다. 칭의를 얻었다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화를 이루시는 성령의 역사가 없다는 것은, 스스로가 착각에 빠져있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칭의를 얻은 자들에게는 반드시 성령의 성화의 사역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칭의의 일회성 선언 만을 가지고 무책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칭의의 연속성인 성화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머무름을 이루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종말론적인 긴장이있습니다. 먼저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이후에는 순종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성실한 믿음은 반드시 진실한 행위와 경건한 생으로 이어져야하며, 스스로 믿음이 있다는 말 만 하고 행위가 없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믿음이 죽은 것임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행위는 믿음의 표현이고 믿음은 행위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한 칭의가 우선 있어야 하고, 성화의 일생을 통하여 그 칭의가 종말론적 현재로서 마지막 영화의 날 까지 유지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과거에 받은 칭의를 매 순간 현재화하고, 우리의 발걸음을 미래의 영화를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게해줍니다. 이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하고도 충분한 늦은 비 성령의 도우심이 늘 우리의 곁에 상존해야하는 명백한 이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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