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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율법(계명) 관계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본다.

 1) 율법주의: 율법은 변할 수가 없다.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구원이 있다.

 2) 은혜주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 진다.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후에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율법은 폐했다.

 3) 순종주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는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

                     율법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재림교회의 구원론은 3) 입장을 취하고 있다.

지금은 편의상 "순종주의" 했다.

타교인: "믿음으로 구원얻었으니,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 안식일을 지켜야 하나?"

재림교인: "구원 얻었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지켜야한다."

타교인: "그럼 안지키면 어떻게 되는가? 구원이 없는 것인가?"

재림교인: "안지키면, 짐승의 표를 받게된다. 멸망하게 된다."

타교인: "그럼, 그것은 율법주의 무엇이 다른가?"

재림교인: "???"

 

오늘날 재림교회의 정체성의 현주소 .

이것이 오늘날 재림교인들을 어정쩡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타교인들과 같이 은혜 받았다는 기분이 

아직 미완성품 이라,율법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중압감에,집행유해를 받은 기분이다,

확근한 기쁨을 누릴 없게 됐다.

재림교인들은 결국 세가지 입장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이곳의 상당수의 독자들과 같이 은혜주의로 빠지든지,아니면 율법주의로 빠지든지,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에서 머무르며,세월만 눈치보며 사는 미지근주의 재림교인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참으로 비참한 현상이다.

이렇게 것인가?

 

순종주의는 본래 재림교회의 구원론이 아니였다.

교단이 커지다 보니,

이제는 사회의 책임을 인식하지 않을 없게 됐다.

이단의 집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은혜주의를 먼저 말하고 율법은 뒤로 하여

율법의 기능을 약화시켜 놓았다.

 

그러나 내심적으는 때 만 되면,

일요일 휴업령만 내리면,

안면을 완전히 바꾸고 율법주의로 나갈 태세다.

아니 그런가?

 

우리는 전까지 "율법주의", 이단으로 취급 받은 것은

율법을 먼저 내세우고 다음 은혜를 내세웠기 때문이였다.

 

순서를 바꾸어서,

얼마전 어떤 단체로 부터 공식적으로

이단이 아니라는 인정을 받고 한국 교회가 좋아하는

해프닝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한국교회 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이런한 작업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교회 높은 지도자들은

교회를 세계화하려 하고,

신실한 평신도들은 그러한 지도자들을

마땅해 하고 있다.

 

사이에 엄청난 괴리 깊어 가고있다.

그러는 사이 평신도 들은

미적 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예언을

그야말고 충실하게 이루어 가고 있다.

 

다시 간단히 정리해보면,

 

(a) 율법 -> 믿음 -> 구원 등식을,

(b) 믿음 -> 율법 -> 구원 이라는 등식으로 정리해 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위의 공식(a), (b) 원래의 재림교회의 구원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4) 길이 원래의 재림교회의 구원론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편의상 "연합주의"하겠다.


먼저 글에서,


(a) 율법 -> 믿음 -> 구원 의 등식을,

(b) 믿음 -> 율법 -> 구원 이라는 등식으로 정리해 가고 있다.


위의 과정을 다시 나열하면,


(a) 율법 -> 은혜 -> 구원

(b) 은혜 -> 율법 -> 구원  


같은 표현이다.


(a), (b) 다 바른 구원론 내지 구원과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b) 의 구원의 과정은 전혀 재림교회의 구원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재림교회가 이 과정을 공식적인 구원론으로 가르치려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단의 굴레를 벗어나 세계적인 교회로 인정받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 일 뿐이다.

참으로 통탄 할 일이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 지를 가늠 조차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재림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아래와 같다.
아래와 같아야 한다.

"우리들이 세상의 구속주와 여호와의 율법을 함께 바라볼 때
그 두 속성의 연합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시18:35)
라고 부르짖게 한다. (리뷰 1892.12.13)"

"그 두 속성의 연합" 이라는 표현은 신학적인 용어라기 보다는 
화학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하면 시너지 효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다른 두 개체가 합쳐질 때,
각각의 개체에서 만 볼 수 없었던
새론운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위의 글에서 다윗은 두 속성이 연합 했을 때
새로운 깨달음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기뻐했다는 표현이다.


산소는 산소고 수소는 수소다
따로 볼 때는 아무리 봐도 
산소는 산소고 수소는 수소다
그러나 산소와 수소가 동시에 연합할 때,
전혀 새로운 "물"이 라는
상상도 못할 물질이 된다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스님의 깨달음을
우리는 깨달음의 금과 옥조로 말하 곤 한다.

그러나 산과 물을 함께 바라 볼 때,
전혀 다른 아름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은 율법이고 은혜는 은혜다
백년을 드려다 봐도
율법은 율법이고 은혜는 은혜다.

이곳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똑 같은 얘기를 우리는 몇년을 두고
서로 다투고 있지만,
율법은 율법이고 은혜는 은혜다.

그러나 E. G. White 은 우리에게
그 두 속성을 함께 바라보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 곳에 새로운 놀라운 깨달음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까지 어느 신학교의 신학자가,
어느 교회의 목사가, 
과거나 현재를 통해서,
이와 같은 말이나 글을 썼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어느 다른 교파가 이런 가르침을 줄 수 있겠는가?

율법을 경시하고 폐했다는 생각에서
이런 사고가 나올 수 있겠는가?

율법을 계륵으로 생각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깊은 명상이 창조 될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니 재림교회의 가르침이,
재림교회의 교리가,
진정 탁월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것인가?


나는 이 글을 교회를 비하 하려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댑니다.

교회를 사랑하되 어느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3대째 재림교인으로 꼴통 중에 꼴통입니다.

그래서 쓰는 것입니다.


율법을 비하하는 것은

교회를 비하하는 것 보다 더 큰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영합하려고,

율법의 역할을 compromise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죽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글을 5회 까지 쓰려고 합니다.

나의 글을 다 읽으시고 그 때 평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글로 인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한번 쯤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끝으로 이 게시판이 몇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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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우리는 "율법" 하면 "행위"라는 프레임에서 

보려하는 경향 때문에 성경이 제시하고자 하는 원래의 

법의 목적을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법을 연구한 자도 아니다.

그러나 재림성도로써

그동안 관찰하여 나의 생각을 이곳에 나누려고 하는 뿐이다.

 

나의 입장은 

믿음 혹은 은혜 뒤에는 율법의 역할이 끝났다고 보는 견해,

믿음 혹은 은혜 뒤에는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 견해,

 

위의 언급한 견해가 원래의 재림교회가 추구하는 구원론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반증으로 아래의 E.G. White 글을 소개하였다.

 

"우리들이 세상의 구속주와 여호와의 율법을 함께 바라볼

속성의 연합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18:35)

라고 부르짖게 한다. (리뷰 1892.12.13)"

 

율법과 십자가의 은혜를 함게 바라보는 것과

따로 따로 생각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비아냥 거릴 분이 있을 것이나,

 

바로 지금 우리가 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 하면 행위로만 보는 프레임에서 벗어 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속성 기능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 속성"이라 때는 기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E.G. White 글을 하나 소개한다.

 

"이와같이 인류의 구속의 계획에는 공의와 자비가

결합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와같은 결합은 오직 무한한 지혜만이 고안해 낼수 있고,

무한한 능력만이 성취시킬 있다.

그것은 하늘을 경탄과 경외감으로 충만케하는 결합이다. (대쟁투 415p)"

 

우리가 단순히 법을 법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다.

뒤에는 엄청난 계획과 design mind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우주 거민들을 경탄케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도 경탄해야 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놀라운 statement 아닌가!

 

님은 의도적으로 고안해 무한한 지혜에 대해 깨닫고,

경탄과,

경외감으로,

충만해 본적이 있는가?

우주 거민들과 같이

 

...

 

따지고 보면,

일반 개신교인들이 계명의 역할없이 십자가에서 느끼는 은혜와

우리 재림교인들이 계명의 역할없이 십자가에서 느끼는 은혜는

다를 바가 없다.

 

단지 재림교인들은 은혜 후에 계명을 순종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계명의 역할없이 느끼는 일반 개신교인들과 재림교인들이 느끼는 은혜가,

위에서 말한 경탄과 경외감으로 충만한 은혜가 있을까?

 

"속성의 연합" 혹은 "결합" 만이

경외감으로,

우주거민들을 경탄케 한다고 권고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재림교인들이 은혜와 율법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무서운 오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내가 이곳에서 율법이라 할 때는 주로 성경 말씀과 십계명을 말함이다.

의문의 율법탈무드유대인의 사회법제사제도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계명이라  때는 십계명을 말함이다.)

 

먼저 이 두가지 속성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구속주 즉 십자가의 속성은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시간상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계명의 속성은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아래 세가지 속성은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한다고 본다.

 

1) /통치(Law) : 공동체의 질서 유지와 통치를 위한 기능

2) 몽학선생(Leader) : 그리스도를 필요케 하는 기능

3) 동기유발(Motivation) : 최고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고 싶은 동기를 유발 시키는 기능  

 

 

1) /통치(The Law)

 

당연히 법의 기능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하기 위한 기능이다.

그러나 계명을 단순히 이러한 사회학적인 요소 만으로    없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설정은

긍극적인 인간의 행복과 생명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명은 생명의 법이다.

 

생명의 법이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없으면 죽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법을 범해도 당장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해서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히 잘못  생각인 것이다.

 

중력의 법칙,

체온의 365 유지 법칙,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의 산소 21% 유지 법칙이

당장 무너지면 우리는 생명을  이상 유지  수가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유지 법칙,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유지 법칙이 이행되지 않으면,

손상이 되면,

원래의 영원한 관계가 깨어지면,

인간의 행복은 깨어지고  결국 죽는다는 것이다.

 

법은 인간들이 사회법을 만들 듯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물질들 사이의 관계법을 만들었듯이,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가 필요해서

만들어  관계유지 법칙인 것이다.

 

 법이 없으면 신과 인간과의 사이는 없는 것이다.

 법이 없으면 인간과 인간 사이도 없는 것이다.

관계사이의 법이 없다는 것은  존재도 없다는 것이다.

 

존재들이 존재하는

관계유지 법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생명을 공급하고 그 관계를 유지시키고,

다스리시는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을 인식해야하는 것이다.

 

모세가 만난 우레와 번개 가운데,

맹렬한 불 가운 데 계시는,

그 여호와 하나님을,

Mighty God ,

 

이 계명이라는 창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 때 시내산의 모세의 심정으로,

다스리시는 그 절대자를 볼 수 있어야 만 한다.

이 사실이 내 마음 가운데 깊이 인상 되어 지면 질 수록,

내가 받을 은혜도 그와 비례하여 크게 되는 것이다.

 

2) 몽학선생(Leader)

 

 3:24 한번 몽학선생이라는 말이 나온다하여서

우리는 계명은 단지 임시직인 것처럼 취급하는 ,

그것은  오해요 잘못된 생각이다.

 

로마서 7 전체는 바로  계명의 몽학선생 기능을

논리적으로 법의 원리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결과로 8 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결론을 이루는 ,

계명이 어떻게 몽학선생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지를

그러므로라는 수식어는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 관한 자세한 해석은 이곳에서 하지 않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계명은 살아서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다는 것이다.

나 됨, 즉 인간의 내면 세계를 보게하고,

절망하게 하며,

외마디 비명 소리를 지르게 하며,

나를 코노로 몰아 넣는다.

 

인간의 속절없음을 보게 한다.

내가 죄의 암환자며,

그래서 의사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며

그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며,

 

그래서 십자가가 목마르게 된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인간에 대한 절망이 크면 클 수록,

즉 내가 낮아지면 낮아 질 수록,

내가 받을 은혜는 그와 반비례하여 크게 된다는 것이다.

 

3) 동기유발(Motivation)

 

 기능을 말하기 전에 한가지 같이 공감하여야  사실이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아주 견고하고 단단한  같지만,

사실은  순간에 무너질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단이 노리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은 강제하시는 분이시다” 라는 말이

한 번이라도 알려지는 순간 천사들과 우주거민들,

아무도 하나님께 경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경배하려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보좌는 있으나 마나  것이 된다.

 

 말은 하느님께 경배한다는 것은 경배자들의 완전한자발적인자유의지에,

의해서  경배하고 경배를 받는 다는 것이다.

 경배에  끝만치도 아주   마치도 “강제성”  있다는 것이 발견 되는 순간

경배는 우주에서 끝나게 된다.

 

하나님  자체 영광과 거룩함도 있지만

경배자의 자원하는자발적인 충성심에서 나오는 경배로 인하여

 거룩함이 완숙되어 지는 것이다.

 

우리가 법을   , “채찍  당근” 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법을 엄하게 다스리기 위해서 벌칙기준을 강하게 하여 다시말하면

채찍 하여 법을  준수하도록 하려 한다.

 

반대로 법을  준수하게 하기위하여 상급을 주어서  법을  지키도록 유도 한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심판과 멸망을 받는다,

라는 생각으로 계명을 이해하고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을 “강제 하여 경배 받으려는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보좌를  순간에 무너트리는 처사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계명을  지키면 천국이나 영생을 얻을  있다,

라는 생각으로 계명을 이해하고 따르는 자들 ,

하나님을 “강제하여 경배 받으려는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보좌를  순간에 무너트리는 처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욕돌리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사람이라도 천국에  사람이 있다면,

 순간 하늘의 경배는 거룩함은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조금 만 치라도 강제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자원해서순수한 자유의지에서 드리는 경배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채찍과 당근”  계명의 정신과는  생각이며 위험한 생각임이

분명하여 졌다.

 

계명이 일반사회 법과 다를  밖에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명을 일반사회 법으로 설명하려 하고

좀더 나은 생각으로 “윤리 범주에서 다루려 하나

 또한 계명이 가지고 있는 정신에는 미치지 못하는 하위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윤리란 행위자의 생각이 어떠하던 나타난 행위로 밖에는   없는 것이다.

 속은 싫어도 상대방을 위해서 선하게 보이는 행위는 얼마든지   있다.

 

예수님께서  “너러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5:41)

 

윤리적으로는 억지로 오리만 가도 우리는  사람을 선하다고 한다.

 

그러나 십리를 가는 것은 선한 동기유발,

적극적인 계명 수행자가 아니면    없는 생각이다.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말씀은 사실 십계명에 없는 조목이며, 부당한 요구 사항이다.

 

그러나 전 재산을 다 팔 수있는 자는 스스로 동기유발이 된자,

적극적인 계명 수행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동기유발”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3) 동기유발(Motivation) - cont.

 

 

지난 글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절대 강제적으로

경배를 받으실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대부분은

우리들의 대부분은 말이다,

 

멸망이 무서워서

혹은 천국이 좋아서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럴  있는  아닌가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들은,

 

하나님께  돌리는 일이다.

 

이렇게 믿건

저런 이유에서 믿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다.

 

동기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조선 세종 1428 진주에 사는 김화라는 자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조정은 강상죄(사람이 지켜야  도리에 어긋난 ) 엄벌하자고  ,

세종은 엄벌에 앞서 효에 대한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431년에 삼강행실도 라는 책을 발간한다.

군신의 관계부자의 관계부부의 관계를

그림과 이야기로 쉽게 읽을  있도록 했다.

일종의 윤리와 도덕을 백성들에게 교육시키기 위함이였다.

 

급기야 "내가 이를 어여삐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맹기노니..."

1446 우매한 백성을 위한 한글을 제작하여 발표하기에 이른다.

 

 

 

세상의 임금도 이러하거 ...

 

하늘의 임금은 백성들에게 계명을 만들어 놓으시고,

 

너희들 계명  지키면

혹은

너희들 계명  지키면

이라고 하셨을까?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 무엇을 하셨는가?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셨다.

 

"십자가"

"십자가"

바로 그것이다.

 

?

 

감동을 주기 위함이였다.

 

감동은 ?

백성들의 마음을 사기 위함이였다.

 

나는 지금 계명의 기능을 말하고 있다.

동기유발은 어떻게 생기는가?

 

계명과 십자가가 만날 ,

바로  만나는 지점에서,


        1) 생명을 주관하시는 빛 가운데 계신 그 높은 분이(/통치의 속성),

        2) 나같은 속절없는 인간을 (몽학선생의 속성)

 

 …

 

 

있을  없는 용서를 경험한다.”

 

충성심이 생기고,

목숨을 바치려는,


        3) 동기가 유발 되는 것이다 (동기유발의 속성).

 

 

이러한 분이라면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

싶은 마음이 생긴다.

 

자기를  위해 계명을 지키려하지 않고,

남을 위해 법을 지키려 한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계명은 나를 위한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계명은 남을 위한 생애의 목적이 된다.

그리고  일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 한다.

 

 

 

세종이 법을 위해서 삼강행실도를 만들고

한글을 만들었 듯이

 

하늘 임금은 법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세종은

백성을 어여삐 여겨,

법을  쉽게 하거나 없애버리지 않고,

윤리와 한글을 더해서,

교육을 시켰다.

 

하늘 임금은

백성을 어여삐 여겨

법을  쉽게 하거나 없애 버리지 않고,

십자가를 더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려한다.

 

 

 

좀더 쉬운 말로 말하면,

법은 사람을  팔리게 만든다.

무슨 말인가?

 

실례를 들어 보자.

 

사울이

나쁜  예수를 잡으러 가다,

다메섹으로 가던 ,

보좌 우편에 찬란한  중에 계신 예수를 본다.

히피 같은 예수인  알았는 ,

 가운데 계신 예수를 보는 순간,

 

사울은

완전히  팔리게 됐다.

완전히 존심 상하게 됐다.

죽을 맛이 됐다.

이젠 죽었다고 생각했다.

 

 호라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외마디에,

 

순간,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있을  없는 용서

 

구원이 아니라

먼저 용서를

 

거기다가 사명까지 받았다.

사울은 돌아 버렸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는 순간이였다!

 

계명과 십자가가

 인간의 마음을  버리는 순간이였다.

 

 

 

우쭐되던 베드로는

세번 예수를 강하게 저주하고,

 

인자한 눈과 마주치고는

 

완전히  팔리게 됐다.

완전히 존심 상하게 됐다.

죽을 맛이 됐다.

 

 양을 먹이라

 

 

있을  없는 용서

 

구원이 아니라

먼저 용서를

 

거기다가 사명까지 받았다.

 

십자가에 꺼꾸로 매달려 죽겠다고

청구한다.

 

계명과 십자가가

한 인간의 마음을 사 버리는 순간이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지혜와 공의와 자비를


충분히 깨달은 후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이런 특성들에 대하여 올바르게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분께 이끌려가기 때문에

 분을 사랑하게  것이다. “(대쟁투 541p)

 

이러한 두 속성의 연합을 충분히 깨달음 없이 얼마나

많은 설교가 목사들과 지도자들에 의해 설교단에서 선포 되였던가!

 

은혜 받았으니, 천국은 너의 것이라고…”

아니면 은혜 받았으니, 계명에 순종하라고, 그러면 천국은 너의 것이라고…”

 

!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섞인 포도주에 취하여 있는가!

 

 

계명없이, 절망적인 회개없이 은혜의 왕국은 오지 않는다.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가 아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이다.

 

이 세대에게 필요한 침례요한의 웨침은,

 

다시 회개하라, 은혜의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가 될 것이다.

 


Rocket이 중력을 이겨야 인공위성을 제 궤도에 올릴 수 있다.

제 웨도에 올라가지 못한 인공위성은 중력의 힘에 의해 자꾸 땅으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내가 받은 은혜가 제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계명 즉 엔진의 힘을 빌려 중력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궤도에 진입한 인공위성은 떨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돈다.

 

계명의 역할 없이 쏘아 올린 은혜는 시간이 가면 땅으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이와 같이 계명은 인간에게 은혜를 더하기 위한 기능이 그 우선인 것이다.


성소 뜰에서 양의 피를 그릇에 담고 은혜 충만하여 밖으로 만 돌아다닌다면,

아무 효혐이 없는 것이다.

 

또 양의 피를 들고 은혜 충만하여 밖에 놔두고 지성소의 계명앞에 서서 내가 계명을 즐겨 순종하겠다고

서약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양의 피는 지성소 즉 계명앞에 섰을 때에 만 그 효혐이 있게 되는 것이다.

 

재림성도들이여,

잘 들으시라!

 

양의 피에 은혜 충만한 후,

구원받았다고 확신한 후,

지성소 계명앞에 서서, 계명을 순종하겠다는 것이

원래 지성소 하나님의 계획인가?

 

용서는 양의 피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피 때문에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양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 계명앞에서,

시은좌 앞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명으로 인해 내가 먼저 죽어야한다.

통절함이 먼저 있어야한다.

피의 필요성을 절감한 후,

 

하나님이 용서 하여 주시는 것이다.

 재림교회가 가진 구원의 가르침은 탁월하다.

그것은 변할  없는 계명과 십자가의 원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은혜로 구원 얻었으니 계명을 순종하라고 가르친다.

이제,  구호가 얼마나 잘못되었는 가를 알겠는가?

구속주와 여호와의 율법을 함께 바라보 구원의 경험만이

참다운 재림교회 구원의 원리인 것이다.

 길만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구속주와 계명을 함께 바라 보아야,

계속 포도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은혜로 구원 얻었으니 계명은 필요없다라고 믿는

은혜주의자들에게 고한다.

 계명을 무시하고  모든 구원에 관한 책들은

기분은 좋게 할 지 모르지만,

님을 교만하게 하며

욕망에 만 사로 잡히게 만들 뿐이다.

 

예수님이 마지막 우리에게 약속한 보혜사는

바로  일을 위해 약속  것이다.

 

성령님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의에 대하여심판에 대하여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신다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지성소를 일컬는 말씀이다.

바로 계명과 보혈의 피가 함께 있는 장소에서 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바른 깨달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

 

 

계명 없이 어찌 우리 마음 가운데 죄를 논할 수가 있겠으며,

 절대자 앞에 겸허하게  수가 있겠는가?

 

정리하면,

 

은혜받을 때의 계명의 역할과 은혜받은 후의 계명의 역할이 틀린 것이다.

 

은혜 받을 때에 계명이 빠지면 그 은혜는 은혜가 아니다.


은혜 받은 후에 계명이 빠지면 은혜 받은 자가 아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구속주와 여호와의 율법을 함께 바라볼 

  속성의 연합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18:35)’

” (리뷰 1892.12.13)

 이렇게 동기 유발이 된 자들은,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이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정복자들이 되는 것이다.

 

침례요한의 기별을 제대로 받아드리고,

회개와 함께,

은혜의 천국을 맛 본 자들은.

 

그래서 동기유발이 된 자들은,

 

재림을 기다리지 않고,

재림을 만들어 가는 자들이며,

 

천국을 이 땅에 세우는 정복자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가진 형제들이여!

 

섞인 잔에 취하여 만 있지 말고,

안약을 눈에 바르고,

이제, 분연히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들이 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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