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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하다 강대에 쓰러져 죽는 것이 소원

 

“설교하다가 강대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나이 70을 넘긴 노인 크리스천이라면 청년시절까지에 이 같은 말을 한두 번은 들었을 것이다. 필자도 그 당시 교역자들로부터 설교를 통해, 또는 담화 중에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다.

당시의 시골 교회는 목사가 귀하다 보니 형편이 미치지 못해 전도사를 교역자로 모시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도 모자라 전도사 한 분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두 교회를 섬기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런 그들이지만 모두가 어려운 때인데다가 시골이다 보니 받은 사례금이 넉넉할 리 없었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로서의 긍지가 있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부요했다.

그들의 정신적 풍요로움, 그것은 자기희생을 감수함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은총이었다. 목회가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선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는 말이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는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교회생활이나 전도와 봉사활동 같은 것은 신앙생활이고, 일반적 사회생활이야 신앙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하는 일에도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의 이분법적 잣대가 적용되었다. 그러니까 교회생활이나 전도와 봉사활동 같은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만, 그 외의 것들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의 꽃은 목회요, 그 중에서도 예배는 그 핵심인데, 그 정점에 설교가 있다는 의식이 강했다.

그러니 설교하다 강대에 쓰러져 죽는 것은 장렬하게 순교를 하는 것만큼이나 자랑스럽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사실 당시로서는 그런 면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으니 교인들 또한 그 같은 말에 가슴 뭉클해지는 감명을 받는 일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목사가 포화상태가 된지 오래다. 담임목사는 말할 것도 없고 자립교회로 자리가 잡힌 데라면 부목사 자리 하나 얻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더구나 지금의 교인들은 예전과 달라 교역자의 말이라 해서 무조건 아멘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사정이 그러한데 지금도 ‘설교하다가 강대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라 말하는 목사가 있다면 어떻겠는가. 아마 실소를 금치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실제로 그런 목사가 있었다. 그도 그냥 목사가 아니라 신학대학 교수를 하다가 뜻하는 바가 있어 목회현장으로 나온 분이었다.

그 목사님은 나이 80을 넘겼는데도 담임목사 자리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았다. 은퇴연령이 제한되지 않은 교단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나이가 많다 보니 발음도 불분명하여 무엇보다도 설교에 문제가 많았다. 그 외에도 나이 많음에 따른 문제가 이것저것 많았다. 교인들은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라고 정중하게 권해 드렸으나 듣지 않았다. 교인들이 하나 둘 떠나 교회는 움츠러들 대로 움츠러들었다. 자식들까지 나서 그만두기를 바랐으나 ‘설교하다가 강대에서 쓰러져 죽는 게 내 소원’이라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교인들의 강력한 요청에 충격을 받아 쓰러져 세상을 뜨고서야 물러나는 비극을 맞고 말았다.

옛날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그런 말을 했다. 물론 그 목사님께서도 아마 그런 마음이셨을 것이다. 무엇인가 판단을 잘못하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설교를 하다가 그대로 쓰러져 숨을 거두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죽음도 없을 것이다. 그 목사님께서도 아마 그런 것을 생각하셨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 하나님? 아니면 무엇을 위해? 하늘나라? 아니다. 다 아니다. 결국 자기를 위해서이다.

 

본말을 전도하지 마라

 

노인이 되면 대개가 그러다시피 필자도 나이가 많아지다 보니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제 내일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된 것이다. 언제 하나님께서 불러 가실지 모르지만, 그때에는 지금보다 나아진 모습이 되어 그분의 품에 안기고 싶다. 그것이 필자의 가장 큰 소망이다.

그리고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도 바라는 것이 있다. 너무 오래 고생하지 않고 죽음을 맞는 그 순간까지 또렷한 의식을 유지하며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입술만이라도 딸싹거려 찬송하다 기름이 다해 사그라져 꺼지는 호롱불처럼 가서 하나님 품에 안기고 싶다. 이는 필자의 과한 욕심일지 모른다. 그러나 앞에 든 목사님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본말이 전도되는 일에 빠지기도 한다. 정치인들 가운데 많았던 일이기는 하지만, 옛날에는 구호품을 들고 기자들을 대동하여 학교로 찾아가서는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가난한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가며 모두가 보는 앞으로 나오게 하여 카메라의 플래시가 이어 터지는 가운데 단상에서 전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럴 때면 불려 나간 학생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발갛다 못해 파랗게 질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금도 정치인들은 선거 때만 되면 재래시장을 누비고 다닌다. 무엇인가 자질구레한 물건도 사고 떡볶이도 자못 맛있다는 듯이 사먹는다. 대통령도 지지율이 떨어지거나 서민을 등한시한다는 여론이 일면 재래시장으로 달려가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시장을 나올 때면 샀던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무엇을 샀는지 조차 기억에 없다. 서민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서민의 탈을 쓴 것이다.

국민들도 바보가 아니니 이를 모를 리 없다. 알지만 모른 척, 아니 별 생각 않고 그냥 그들의 행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 그들의 그 같은 행위는 엄밀하게 말하면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제 이익을 위해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기를 치는데도 그들에게 힘을 실어 준다면 그들의 사기행각은 언제까지도 계속될 것이다.

앞에서 하나의 예만을 들었지만 본말의 전도는 정치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들에도 목사들에게도 수없이 많다. 필자의 모교회에서는 성탄절이 되면 열악한 재정 가운데에서도 작지만 구제를 했다. 그 해도 그랬다. 아직 당회가 구성되지 않은 때였던지라 제직회를 열어 그 방법을 논의했다.

집사들은 두세 사람을 골라 나누자 했으나 목사는 그럴 필요 없다며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전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껌 값도 안 되는 미끼에 구제라는 이름을 붙어 사람을 낚아 보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집사들은 그게 껌 값에도 못 미치는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리고 생활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생색만 낼 수 있다면 좋다는 식의 구제는 구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끼니를 잇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해서 구제 대상을 줄이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신앙상의 본말전도는 목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한데, 그것은 교인인 나에게도 있을 수 있다. 헌금봉투에 이름을 써 밝히는 것에도 그렇고, 사람의 눈을 의식하여 하는 모든 일들 또한 그러하다. 봉투에 이름을 쓰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눈이 없어 헌금을 누가 했는지 모르실 것이며, 능력이 모자라 사람들의 눈을 통해 확인을 하시겠는가.

“목회, 정말 하나님의 일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목회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면 뭐라는 말인가. 세상일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마귀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자기 것이나 교회 것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 또한 구제임이 분명하고 하나님의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일들을 순수하지 못한 생각으로 한다면 순수한 하나님의 일은 되지 못한다. 심해지면 마귀의 일이 되고 만다. 마귀가 바라는 일로 그 궤계에 의해 그리 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믿는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만왕의 왕이신 그분의 자녀이니 하늘나라의 왕자요 공주이다. 그러니 쩨쩨하거나 치졸해서는 안 된다. 물질이 적어도 마음은 넉넉해야 되고, 얼굴이야 미남 미녀가 아닐지라도 마음씨는 고와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 밭을 마귀가 짓밟지 못하도록 기도하며 지켜야 한다.

오스트리아의 제프 딕슨이라는 사람이 쓴 ‘우리 시대의 역설’이라는 글이 인터넷의 여기저기에 많이 올라와 있는데, 이미 읽은 독자도 있을지 모르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아 좀 길지만 여기에 그대로 소개함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인터넷 상의 그 글들은 서로 조금씩 다르기도 한데, 그 중 하나를 고른 거라는 걸 밝혀 둔다.

 

 

우리시대의 역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더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라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난다.
너무 책을 적게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주며
거짓말을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리고
수명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서두르는 것은 배웠지만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엄청나게 일을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한다.
자유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맞벌이가 늘어나지만 이혼은 늘고
집은 근사해지지만 가정은 깨지고 있다.
세계 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기쁨은 줄어들었다.
식품은 다양해졌지만 영양가는 줄어들었다.

수많은 컴퓨터를 설치하여 더 많은 정보를 얻지만
소통은 더 줄어들었다.
아는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친구는 줄어들었다.

더 빨라진 고속철도
더 편리한 일회용 기저귀
더 많은 광고 전단
그리고 더 줄어든 양심
쾌락을 느끼게 하는 더 많은 약들
쇼윈도에는 수많은 상품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저장고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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