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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1 21:45

나는 숙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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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것 같던 지루한 겨울의 은둔도 이제는 그 검은 휘장을 벗고 바깥 뜰에 나와 따스한 봄볕을 쬐고있습니다. 소리없이 번지는 봄 기운에 촉촉해진 옛 그리움이 매화 향기를 타고 의식 안으로 흘러듭니다. 


'기억하라'와 '공경하라'라는 생명적 계명의 초청을 수용한 재림성도로서 적어도 창조주와 부모를 망각하는 치매와는 담을 쌓아야겠다는 기특한 자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몇 해 전에, 지적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단에 등단하여, 생의 기억을 토대로 깊이 반성하고 사유하며 그 위에 문학적 철학적 언어의 옷을 입히는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니 이름 외에 아호의 필요성이 생겨났습니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어느 날 문득 어릴적 어머니의 초상이 기억의 수평선에 떠올랐습니다. 


'둘째야, 니는 왜 같은 콩보리 밥을 먹고 하는 짓은 늘 숙맥이고?' 평소 숙맥의 의미를 아시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농담이자 하소연입니다. 나는 늘 그래야 만 되는 줄 알았지요. 둘째로 태어나, 우선권은 죄다 맏이에게 빼앗기고, 그나마 남아있는 쓸 만한 것들은 모두 막내에게 양보해야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배우고 그러려니 체념하고 자랐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양보의 고귀함을 순진하게 그대로 믿었으며, 교회에서도 그렇게 가르치니 어쩔 수 없이 모범생인 나는 숙맥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하소연은 점점 나의 성격으로 변하여 드디어 숙맥은 숙명이되어 나의 소년 시절을 특징지었습니다. 나는 어느새 속까지 어리숙한 숙맥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두 살 위인 맏이에게 단 한 번도 말대꾸를 한 기억이 없을 만큼 그의 위광은 초등했고, 나의 순종은 가히 종교적이었습니다. 세 살 아래인 막내에게는 당연히 형인 내가 보호자 역할을 해야한다고 나름 그렇게 믿고 자랐습니다.


숙맥은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의 숙맥불변(菽麥不辨)의 준말입니다. 밀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동정이라도 가겠지만, 척 보면 분별이되는 콩과 보리를 혼동하다니 정말 쑥맥입니다. 첫 발음에 강세가 들어가면 그는 이미 구제 불능의 경지에 다다른 숙맥인 셈입니다. 예, 나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좋게 말하면 지나치게 순수하거나 숫기가 없는 소년이었습니다. 


교실에서는 키가 작아서 늘 맨 앞 줄에 앉아서 스승님의 해타를 동그란 얼굴에 무제한으로 받으며 공부했지만, 간혹 어려운 질문을 던지면 한 번도 자신있게 손을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결국 아무도 답을 맞추지 못하자 알려주신 정답은 이미 내 머리 속에 있던 것이었고 며칠 동안을 손을 못 올린 나 자신의 소심함을 꾸짖고 원망하곤했습니다. 


싸움에 임하여는 단호해야 하고, 목적을 달성함에 있어서는 민첩해야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주관과 생각을 선뜻 표현할 줄 모르는 순진무구한 사람, 한심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도리가 비리로 바뀌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독소가 숨어있는 세상의 약은 처세술을 제쳐두고,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모두가 한결같이 바르고 정의로와야 한다고 철썩같이 믿고있는 어수룩한 숙맥이었습니다. 


목적이 선하면 수단은 묻지마이고, 결과가 정당하면 과정은 문제 삼지 않는 세속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목표에 도달하려면 꾀부리지 말고 꾸준히 한결같이 곧게 걸어가야한다고 훈육받은 터라, 곁길로 가는 것은 엄두도 못내는 이 숙맥에게, 질러 가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고, 모로 가는 것은 야비한 짓으로 여겨졌습니다. 


다행하게도 청년 시절, 이러한 숙맥의 생활방식을 지지해준 한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한 권의 책을 책꽂이에서 뽑아 읽고 다시 그 자리에 꽂아 놓았을 뿐인데, 나는 이미 조금 전의 내가 아니었습니다. 앙드레 지드가 말하는 책 한 권의 위력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경우에서 처럼 나의 생애에서도 성경이 바로 그 책이었습니다. 책을 읽지 않은 여인은 향기가 없는 꽃이듯이, 이 한 권의 책이 없는 인간은 죽은 생명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행히 그 책은 바로 나같은 숙맥을 위한 책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놀랍게도 왕 숙맥을 만났습니다. 젊은 날 폭풍처럼 나의 영혼을 강타한 책, 수십 번을 읽으며 자아를 발견하고, 생을 이해하며, 지혜를 배우고, 초월적 세계와 영원의 지평에 눈을 뜨며, 밤하늘의 별들 처럼 빛나는 도덕율을 이 가슴에 새기게한 책입니다. 이성 대신에 영성을 이승 대신에 저승을, 시간 대신에 영원을 추구하게한 이 책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었고 인생의 위기 때 마다 나를 다잡아 주었으며, 열정을 키워주고, 시대를 바라보는 예언적 안목을 갖추게해 주었습니다. 방황하던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으며, 그 책을 통해서 든든한 동지들을 만났고, 친구와 연인을 만났으며, 때로는 적을 만나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숙맥 중의 숙맥으로 사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오늘까지 이 책은 나에게는 사유의 숲이고, 지혜의 원천이며, 삶의 근거입니다. 자연과 가장 밀착하려면 맨발로 잔디 위를 걸어야하듯이, 주님과 가장 가까이서 동행하는 길은 말씀 위를 손잡고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은 하늘에서 나의 머리 위로 비추고, 은혜의 단비는 나의 심령 속으로 스며들어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습니다. 위대하신 숙맥의 거룩한 희생은 이 어리숙한 작은 숙맥에게 새로운 용기와 분발이 되었습니다. 나의 삶의 숨결이 힘을 얻은 것은 바로 여기였습니다.


진정한 삶은 내면의 본래적인 자아와 일치하는 삶을 살 때 성취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 혼돈의 시대에, 위로는 하늘에 대하여 충직해야하며, 아래로는 내면에 뿌리를 둔 진실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지식 보다 십자가 위의 그 분을 만나야합니다. 이론이 아니라 인격 깊은 곳에서 우리의 영혼이 신성과 마주쳐야함을 이 책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세상은 이미 많이도 오염되었으며, 양심은 화인 맞아 무디어졌고, 믿음은 방향을 잃은 듯 휘청거립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순수한 믿음의 신비를 내면에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진리의 그릇에 담기고 거듭남의 호수에 잠긴 우리의 순진하고 소중한 믿음에 균열을 내고, 신앙의 기초에 흠집을 내려는 은밀한 유혹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안전한 것은 이 한 권의 책을 가슴에 품고, 한 분 만을 바라보며, 숙맥 처럼 묵묵히 한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우리의 믿음의 발자국 위에 비치는 5월의 석양이 눈부시고 영롱합니다. 나는 마음 한 구석을 비우는 숙맥의 삶을 기쁨으로 선택합니다. 어린이와 바보는 진리를 말한다고 하니, 숙맥이란 말이 더 가깝고 친숙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나는 <숙맥>을 아호로 선택했습니다. 부친이 지어주신 이름도 좋으나, 어머니가 불러주신 이 숙맥이 더 정겹습니다. 성경의 언어로는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이 숙맥이지만, 이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고 강한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섭리에 감동합니다. 


어느듯 마지막 광휘의 여운을 남기면서 오늘 하루도 조용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사라지려고합니다. '둘째야, 니는 8순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아직까지 콩 보리를 분별 못하는 숙맥이란 말이냐?' 하시며 눈을 흘기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 어머니, 숙맥은 이제 저의 이름의 일부가 되었는걸요.' ♧

(5-2023 숙맥 남명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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