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29 18:00
어머니의 여한가(餘恨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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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여한가(餘恨歌) ♡
쇠락하는 양반 댁의 맏딸로 태어나서
반듯하고 조순하게 가풍을 익혔는데
일도 많은 종갓집 맏며느리 낙인찍혀
열 여덟 살 꽃 다울제 숙명처럼 혼인하여
두 세 살씩 터울 두고 일곱 남매 기르느라
철 지나고 해 가는 줄 모르는 채 살았구나!
봄 여름에 누에치고, 목화 따서 길쌈하고
찹쌀 쪄서 술 담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
피난 나온 권속들이 스무명은 족한데
동지섣달 긴긴밤에 물레 돌려 실을 뽑아
하품 한 번 마음놓고 토해보지 못한 신세
내 자식들 헤진 옷은 대강해도 좋으련만
침침해진 눈을 들어 방안을 둘러보면
학식 높고 점잖으신 시아버님 사랑방에
고추 당추 맵다해도 시집살이 더 매워라.
토끼 같던 자식들은 귀여워할 새도 없이
안채 별채 육간 대청 휑 하니 넓은 집에
명절이나 큰 일 때 객지 사는 자식들이
손톱발톱 길 새 없이 자식들을 거둔 것이
회갑 진갑 다 지나고 고희마저 눈앞이라
내가 먼저 죽고 나면 그 수발을 누가 들꼬
무정한 게 세월이라 어느 틈에 칠순 팔순
눈 어둡고 귀 어두워 거동조차 불편하네
홍안이던 큰자식은 중늙은이 되어가고
까탈스런 영감은 자식조차 꺼리는데
내 살같은 자식들아 나죽거든 울지 마라!
인생이란 허무한 것 이렇게 늙는 것을
원도 한도 난 모른다 이 세상에 미련 없다.
서산마루 해 지듯이 새벽 별빛 바래듯이
잦아들 듯 스러지듯 흔적없이 지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