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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부
2016.07.24 17:22

세속화된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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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Peter Vandermeyden

예수님의 ‘전도명령’은 속된 방법들과 세상의 인본주의적 가치관에 의해 침해되고 있다. 교회는 우리 주님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할 거룩한 임무를 가졌다. 1990년대에 서구 세계에는 이교사상이 밀려들고 있는 반면, 지난날의 이교주의와 무신론 세계는 복음을 밭아들이려고 하고 있다. 지금 예수님의 전도명령은 새 차원의 긴급성으로 우리에게 임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소유한 모든 병기를 활용할 때이다. 교회는 역사적 영적 전투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 만일 교회가 영적으로 무장해제를 당한다면 얼마나 큰 불행인가? 우리가 만일 영적 병기를 인간적 방법으로 바꾼다면 얼마나 졸렬한 전략일까? 바울은 우리의 병기가 육적인 것이 아닌가 살피라고 우리를 경계한다.(고후10:4).


오늘날 북미에서는 전에 작았던 지역 교회들이 대교회들로 변모하는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수많은 작은 교회들은 수년 내에 문을 닫을 것이라고 예측된다. 그 원인는 무엇이며, 문제는 무엇인가? 그 원인과 문제의 핵심은 변한 것이 없다. 그것은 신자 속에 남아있는 육성(肉性) 또는 신자의 본성이 버리지 못한 속성(俗性)이다. 이것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교회가 당면한 문제의 한 면은 절대진리에 대한 확신의 상실이다. 교리를 내세우거나 진리와 도덕적 표준을 내세우는 교회들은 인기가 없다.오늘의 교인들은 교회원이 되는 대신 ‘출석자’ 또는 ‘찬성자’ 쪽을 선호한다 오늘 북미인들은 1960년대에 법적 혼인을 비웃듯이, 교회원이 되는 것을 비웃는다. ‘그건 종이 한장 차이 일뿐이야’ 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보고 신자를 신부로 보는 교인관을 가진 교회를 사람들은 기피한다, 뉴스위크지가 보도한 대로 ‘베이비 붐’ (1945-1964년 사이의 출산 급증기에 난 세대-역자주) 세대가 종교에 눈을 돌리고 교회에 몰려들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의 근본 동기는 변치 않았다. 그들은 자유롭기를 원하고, 책임을 지기 싫어한다. 그들은 부, 건강, 행복을 추구하는 외에는 어떤 것에 대해서든지 확고히 확신하는 신념과 용기가 없다.


한 교회에 계속 출석하는 동기는 그 교회가 ‘내 욕구를 채워준다’는 생각에 달려 있으며, 그 말은 결국 내 육적 욕구를 채워 준다는 위장된 말이다, 이 세대는 그들의 어렸을 때부터 그들의 마음의 공허를 채워줄 지속적인 욕구를 추구해 왔다. 그들은 모든 것을 시험해 봤다. 그들에게 줄곧 남아있는 질문은 ‘너 아직도 재미있냐?’ 이고, 그들의 내심에 돌아오는 대답은 ‘아니야 내 영혼이 찾고 있는 참된 내적 평안을 난 아직 못찾았어’ 이다. 이런 세대가 지금 교회 문전에 와서 ‘여기서 그것을 얻을 수 있소?’ 하고 묻는다.


그런데 1990년대의 교회가 저지를 수 있는 최대의 잘못은 이런 질문에 대해 본질적으로 영적인 대답을 주는 대신에 육적 대답을 주는 일이다. 이 세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욕구에 대한 매우 비영적인 이해를 가진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영적 욕구를 상업심리로 채우려 한다. 그들은 여러 음식점을 찾아다니듯이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다닌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기독교 교회를 찾을 때는 그 교회가 그들의 가장 깊은 욕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줄 것을 그 교회에 요구할 권리가 그들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물음에 대해 교회로부터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어떤 메시지를 교회에서 듣는가? 교회를 찾아온 그들에게 교회는 어떤 방법으로 전도하는가? 그 전도는 성경적인가, 육적(肉的)인가?


개심(改心)의 강요(强要)


내가 들어 본 가장 속된 전도방범의 하나는 화란의 한 전도단체가 발행하는 선교 소식지인 ‘와서 우리를 도우라’ 9월호에 실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근년 동구에서 가장 성장이 빠른 종교단체들 중의 하나다. 이 단체가 전에 동구권이었던 나라들에서 집중 전도를 하고 있다. 그들은 온갖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루마니아를 다녀온 한 설교자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여호와의 중인은 그들의 교인이 되는 매인에게 5,000내지 10,000레이 (미화 500내지 1000불에 해당)의 상급을 약속한다는데, 극빈상태에서 사는 그곳 사람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라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소식들이 전날의 소련,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도 들려오고 있다

이 방법은 그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가장 무자비하고 속된 전도 방법이다. 이런 방법으로 받아들여진 ‘개심자’들은 확신 있는 신자이기보다는 강요된 희생자일 뿐이다. 이런 방법을 전도라고 부르는 것은 복음에 대한 모독이다. 이것은 종교적 약탈행위와 같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은 기독교종파가 아니다. 기독교 교회들은 그런 저속한 방법으로 교인을 얻지는 않는다’ 라고 항의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오늘 기독교 교회들이 신자들을 끌려는 많은 방법들도 과연 순수한 영적 동기에서 되고 있는가?


구원보다 성공을 강조


오늘날 교회의 전하는 구원은 전적으로 ‘적극적 사고’의 능력에 의한 현세에서의 성공에 목표를 두고 있다. 미국의 그랜드 래피즈 시의 시민들은 크리스탈 교회(로버트 슐러 목사의 시무교회)에 나올 수 없는 시민들을 위해 ‘슐러 박사를 직접 뵈올 수 있는 신나고 얻기 힘든 기회를 드린다’는 방송을 자주 듣는다. 그 광고의 내용은 금년 봄에 일광봉사회관에서 열리는 ‘성공상담 세미나’에서 캘리포니아의 교도사(힌두교의 교도사, 로버트 슐러 목사를 뜻함-역자주)가 강연하는 ‘슈퍼 성공 ABC’ 강좌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 저녁의 강의 제목은 ‘로버트 슐러의 적극적 사고론과 당신의 인생 성공의 관계’이다. 그 입장권은 한 장에 69불(45파운드)이라니, 주최측이 우선 대성공을 거둔 셈이고 ‘등록자 중 선착순으로 500명은 크리스탈 교회까지의 왕복차표 두 장을 드립니다’ 라는 광고의 결론을 보니, 영락없는 상업광고가 아닌가?


이런 전도방식은 기독교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 ‘전도’가 영혼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런 방범과 복음이 제자의 길과 어떤 연관성 있는가? 그런데 놀랄 일은 자신들이 기독교 복음 전도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큰 집회장을 채울만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집회는 한낱 인본주의적인 동기에서 모이는 기업연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이런 일들을 하라고 하셨던가? 우리주님의 고난주간에 그가 체험하셨던 가장 큰 단식의 하나는 가롯유다의 우상숭배같은 물욕이 아니었던가! 이런 ‘성공 의주의 전도’는 ‘큰 유익을 주는 경건’(딤전6:6)의 증진보다는 우상숭배와 동일한 탐심의 조장을 자장 효과적으로 촉진할 뿐이다.


전도인지, 오락인지?


큰 도시들마다 주일에 가장 흥겨운 순서들을 행하는 교회들이 있다. 사람들은 토요일에 가장 덕을 볼 바겐세일을 하는 백화점을 고르듯이 신문에서 교회들을 고른다. 백화점들이 일요일에 ‘세일’ 경쟁을 하듯이 교회들이 주일에 서로 경쟁을 한다. 가장 화려한‘쇼’를 하는 교회가 교인수 모으기 게임에서 이긴다. 가장 훌륭한 음악 프로그램, 연극공연, 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사의 간증순서 등등을 준비한 교회들을 골라서 사람들은 이 교회 저 교회로 몰려서 다닌다. 이같은 ‘현대예배’에 모여드는 군중의 숫자는 그들이 정기적인 복음설교를 들려주는 것 보다 종교적 오락에 더 큰 갈증을 가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설교’라는 순서가 아직도 교회의 순서에 남아 있을 경우엔, 설교자에 대한 기대는 ‘카리스마’적인 설교자이며, 자부심 있고 사람을 웃겼다 울렸다 하는 부드러운 재주를 가진 사근사근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감정을 돋우는 재주는 많고 사고력을 키워주고 양심을 찌르는데는 약한 사람이라야 한다. 너무 설교자 ‘다워서’는 안된다. 오늘의 청중들은 ‘교리를 말하면 분열이 생긴다! 도덕을 말하면 율법주의자가 된다! 복음의 절대적 진리나 하나님의 세계적 법칙 등을 말하지 말라, 정치적으로도 그것은 틀렸어. 그랬다가는 청중이 상처받는다. 지금은 불경기 시대야. 사람들은 모두 불쾌감을 갖고 있어. 그들은 다독거려야 해. 그늘이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교해’ 등등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교인이 한 교회를 떠나는 공통적인 이유는 ‘이 교회는 내 필요를 채워주지 못해. 나는 나를 기분 좋게 하는 교회가 필요해. 나는 내 인생과 나 자신에 대해 좋은 기분을 가져야겠어. 나는 좀더 적극적인 말을 듣고 싶어’이다. 오늘의 교회 성장에 대한 공통인식은 ‘만일 내가 교인들의 이런 저런 욕구들을 채워주지 못하면 내 교회는 못 자란다’이다. ‘흥미 있는 저녁예배에 교인들을 나오게 못하면 너는 교인들을 모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서 복주시는 사역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원칙을 따를 것인가, 인기를 따를 것인가? 우리는 인본주의적 실용주의자들인가, 성경적 전도자들인가?


건강이냐, 성결이냐?


신유(神癒)를 목표로 하는 큰 교회들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다. 이 동기에 호소하는 경향을 기독교 전도라고 할 수 있을까? 바울은 현세에서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기쁨에 비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롬8:18). 이런 이해는 육적 사고로는 이해될 수 없다. 그 영원한 실재와 그것에 따르는 영광의 일부분이라도 보는 사람에게는 영적 유익이야말로 의미를 가진다. 다만 육체의 치유만을 위해 추종자들을 모으는 사역을 성경적으로는 ‘전도’라고 볼 수 없다. 육체적인 사람도 치유를 원할 수 있다. 유다와 같이 예수를 증오하는 사람도 이적을 행할 수 있었다(마10:1-4: 눅10:20).


‘기적을 믿는다’는 점을 특징으로 내세우는 사역은 극히 경계해야 한다. 주께서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도 ‘기사와 이적’으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고 경고하신다(마24:24: 살후2:9; 계13:14: 19:20). 거짓이적은 ‘광명의 천사’에게서도 나올 수 있으므로 어떤 사역의 배후에 무슨 영이 활동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분별해야 한다(갈1:9: 요일4:1). 육적욕구에 호소하는 사역을 볼 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뿌리가 그 밑에 도사리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롬8:7).


여기서 우리는 오해하기 쉽다. 어떤 신자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믿고, 아니 믿는 차이가 문제가 아니다. 모든 싣자는 하나님의 기적을 믿고 있다. 문제는 신유의 은사를 받았노라고 자부하는 개인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는 점이다. 성경은 ‘이적과 이사’ 또는 신유의 은사를 그것을 행하는 사역자의 진실성과 언제나 연관시킨다(고후12:12; 신34:10-11; 단4:2; 행2:22,43; 4:30; 5:12; 14:3; 롬15:18,19; 히2:3-4). 즉 참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사도의 표를 가진 사람들은 단순히 ‘기적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기적의 체험이 그 사역자가 참된 사역자임을 증명하는 결론적 증거가 되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요한복음 2:23,24에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사람의 속을 아시며(25절), 사람이 기적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을 참신자로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물론 그들을 다 돌려보내지는 아니하셨다. 그는 그들의 믿음이 예수 자신을 아는 믿음이 될 때를 기다리셨다. 그런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예수를 믿지 못했고, 그들의 마음이 여전히 육체적인 채 변화되지 않고 있었음이 드러났다(마13:57; 요6:66).


우리 주님의 전도방법은 명백했다. 그는 그의 청중들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의 참 필요를 아셨다.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고, 그들의 주림을 채워 주셨다(마14:1314). 그러나 그들이 그런 ‘기사와 이적’만을 보기를 바랐을 때 그는 그들을 꾸짖으셨다(마14:15-21; 눅16:31; 요4:48;). 표적을 구하는 것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버릇이라고 말씀하셨다(마12:39;16:4). 그들이 그들의 배를 채울 떡만을 위해 그를 따랐을 때 그는 그들을 책망하시고 ‘하늘에서 오는 떡을 구하라’고 하셨다(요6:26 이하) 마침내 그의 영적 복음을 그들이 거부했을 때 그는 그들을 떠나게 버려 두셨다. 예수는 분명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그들의 육적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아니하셨다.


설교인가, 자기 자랑인가?


‘내 양을 먹이라’는 주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가 설교를 하는 목적은 죄인들의 개심과 신자들의 성격과 봉사의 삶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이다. 그러나 우리의 제한된 통찰력으로는 육적인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숨어 들어오는 위선자들을 구별하여 교회의 성결을 완전히 유지할 수 없다. 전투하는 교회의 사명의 하나가 이와 같은 교회의 내적 불순결에 대처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 대신에 오히려 여우들을 교회에 유혹해 들이는 방법을 교회가 쓴다면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교회가 참으로 땅의 소금이면 교회의 설교와 전도 방법들과 삶의 방식이 세상의 구미에는 맞지 않는 대조적인 부분이 있을 것이다.


성경적인 사역은 교인의 숫자상으로는 성공적이 아닐지라도 교인의 영적 성장에는 가장 확실한 열매를 나타낸다. 좌우에 날이 있는 성령의 검 같은 순수한 복음 설교는 청중에게 양면의 효과를 나타낸다. 즉 육적인 청중에게는 조롱의 대상이 되는 설교가 ‘영생을 얻도록 작정된’ 청중에게는 기쁨으로 믿어지게 된다(행13:44-49).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도가 설교했던 봐와 동일한 설교를 하면 우리도 동일한 반응을 보게 될 것이다. 교회의 반석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보배같이 받아지고, 말씀의 불순종자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된다(벧전2:7-8) 우리도 바울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 자랑하자. 동일한 복음의 메시지가 신자의 영혼을 흥기(興起)케도 하고 죄를 깨닫는 사람에게는 소망을 주나, 완악한 불신자는 물리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병기는 상처도 주고 가려내기도 한다, 심령을 찌르는 성경적 설교는 결코 육적 마음의 존경을 받지 못한다. 참된 설교는 바울시대에 이미 어리석게 보였다(고전1:18이하). 바울 자신이 ‘다이내믹한’ 설교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해 보인 설교는 성령이 확증으로 된 것이었다(고전2:1이하). 그는 육체를 의지하는 것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탁월성(卓越性)만을 의지하는 법을 깨달았다(빌3:3-11). 그도 개심 이전에는 인간의 육체를 자랑했었다. 그러나 그는 내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기는 ‘새 수학’을 은혜로 배웠던 것이다(빌3:7).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자랑으로 군중을 유혹하는 일은 영적으로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경제적 또는 관리상의 시각으로 보아도 위험하다. 그것은 교회의 존립(存立)을 상업주의라는 미약한 기초 위에 두기 때문이다.

교회가 보다 매력적인 ‘지도자’ 또는 보다 흥겨운 ‘쇼’에 관심을 두는 순간부터 교회는 큰 건물과 그보다 더 큰 부채의 짐을 져야 한다. 또 다른 위험성은 교회의 제직들이 ‘교세증가’에만 몰두하는 유능하기는 하나 원칙 없는 지도자의 멍에 아래 굴복하게 된다. 그 결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전도상술’(商術)의 경쟁 압력 밑에서 오로지 교인수와 헌금액의 증가만을 위해 교회의 메시지와 지도방법에서는 점점 더 큰 타협을 범하게 된다.


하나님 중심의 전도


우리 시대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전도를 요구한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교만 앞에서 복음이 수호되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사상이 배격되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과 행위 없이 받는 칭의와 거져 주시는 구원을 전파하여 인간의 교만을 물리쳐야 한다. ‘구원은 주께로 말미암는다’. 육신의 팔은 우리를 구하지 못한다. 주의 팔이 나타나야만 한다. 육적 교만은 제외되어야 한다(롬3:27;엡2:9). 값없이 받는 복음의 은혜는 육적 자만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요구한다(마16:24).


다른 한편, 인간의 공로를 거부하는 복음은 육적 이득도 거부한다. 우리 주님의 소명에는 육적 동기가 포함될 여지가 없다(마10:24; 눅14:26-27; 요13:16; 15;20). 어떤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결심하고 그에게 왔었다 예수는 그에게 천국을 향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육적 기대도 허락되지 않음을 경고하시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마8:20).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댓가의 지불을 명백히 요구하셨다.


제자가 되는 길은 죄인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다(눅14:25-33). 아무나 이 결심을 하기 이전에 그리수도 안에서 나타난 바 혈육이 나타낼 수 없는 것을 보아야 한다. 즉 죄인들은 예수가 주님이신 것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가 그들의 전부가 되셔야 한다. 복음이 이렇게 성령으로 그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들의 ‘임금을 그 아름다운 대로’ 보게 되며, 그 때에만 그들의 결심에는 어떤 육적 동기도 용납될 수 없음을 그들이 깨닫게 된다. 그 때에야 그들도 베드로와 함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된다(요6:68). 그 때에만 그들을 예수의 음성을 듣는 자리에서 유혹해 갈 아무것도 없게 된다.


기독교회는 지금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에 대해 새롭게 신뢰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우리는 불신자들의 육적 감정에 구애받지 말고, 율법과 복음의 진리를 담대히 선포해야 한다. 설교 사역이란 완전히 충족하신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를 지옥에 가기에 마땅할 죄인들에게 선포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소식에 의해 세계는 심판되고 이 세상의 임금(마귀)은 쫓겨나고, 만국의 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오게 된다(요12:31-32). 세계를 휩쓸고 있는 풍조에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들은 바람 같이 변한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바 단순하고, 오랜 전통을 가진, 전도 방법을 유지하자. 이 세대가 참 필요한 것은 성경적이고 교리가 분명하며, 양심을 찌르며 그리스도를 높이는 설교이다. 전도와 교리를 순수하게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단순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의 영광전부와 그의 사역의 완전함 전부를 설교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인을 구원하시기에 온전히 충족하시고, 교회를 다스리시기에 온전히 능하신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이 영적 싸움에서 설교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는 가장 효과적인 병기이다. 이 영적 병기들을 새 확신을 가지고 사용하자.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기 때문이다(고후10:4). 이 병기들은 인간의 힘이나 ‘적극적 사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강력이므로 사탄이 그 모든 힘을 가지고라도 이것들을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 싸움은 주의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주의 싸움이요, 우리의 병기는 주의 병기고(兵器庫)에서 주신 것임을 우리 모두 확신하자(엡6:13이하). 은혜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Rev. Peter Vandermeyden : Free Reformed Church 목사, Grand Rapids, Michigan, U. S.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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