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과 섞임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애굽과 가나안의 경계인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늘 ‘죄인’이라고 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향해 ‘세상에서 나와야 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교인들에게 ‘세상을 향해 가라’고 한다. 그들은’교회로 와야 하면서’ 동시에 ‘세상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교회’와 ‘세상’의 경계 선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흔히 정치적으로 너무 우측으로 기울면 수구반동이라고 하며, 너무 좌측으로기울면 급진좌경이라고 한다. 역사는 개인이나 공동체, 혹은 국가가 이 양축을 시계추 처럼 넘나들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사회의 힘이 급격하게 한쪽으로 치우쳤을때, 양쪽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입장을 나타내는 가장 고전적인 표현이 소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반체제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던 어느 교수가 말한 “새는 좌우의 날개가 있어야 난다”는 말이다. 이런 개념에서 본 다면 ‘경계인’은 위태로운 지역에 사는 사람일 뿐 아니라 충돌하는 양쪽의 힘을 조정하는자 이기도 한다. 기독교 공동체의 대 사회 역사도 좌우의 양축을 넘나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그 양축이 사회와 ‘구별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사회와 ‘섞이어야 하느냐’로 나타났다. 그래서 시대를 따라 그 추가 ‘구별’과 ‘섞임’ 사이를 오고갔다. ‘구별’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흔히 경건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선민의식이 높고 기존 종교질서를 반대하는 분파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그들은 죄를 책망하는 메시아의 사명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영적 도덕적 수준이 낮아지는것을 개탄한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를 끌고 가려는 사람들을 ‘타협주의, 세속주의’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섞임’을 강조하는 사람들은’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주제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메시아의 사명이 ‘죄인과 함께하는 사랑’으로 성취되었다 고 한다. 그들은 세상과의 구별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폐쇄주의, 패배주의’라고 비난하며, 건강한 삶은 ‘열린 삶’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기독교 공동체인 재림교회는 이 ‘구별’과 ‘섞임’의 경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접근은’구별’에 대한 이해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기독교가 사용하는 ‘구별’의 개념을 ‘거룩’에서 비롯된다. 성경에 사용된 ‘거룩’이란 용어가 바로 ‘구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거룩’은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에 나타난다. 흔히 신학자들은 이것을 ‘이행성결”이라고 표현한다. 성도, 성경, 성일, 성물, 성소, 성회, 성전, 등이 그러하다. 성도란 ‘구별된 백성’이고 성일이란 ‘구별된 날’ 이고 성물이란 ‘구별된 물건’ 이며 성소란 ‘구별된 장소’이다. 그러므로 구별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안식일이 구별되지 않으면 성일이 아니고, 성소가 구별되지 않으면 성소가 아니고, 성민이 구별되지 않으면 성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구별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본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섞일 수 밖에 없다. 이는구별된 공간인 성소를 짓게 한 목적에서도 나타난다 성경은 성소의 목적을 하나님이 ‘그들 중 에 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이 한 장소를 ‘구별’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인간과 섞이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성소 건립의 목적을 원형적으로 성취시킨 것이 바로 성육신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가운 데 거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별’은 곧 ‘섞임’을 위한 것이다. 안식일을 ‘구별’하는 것은 그들만 거룩하게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죄인들의 죄를 속죄하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구별’은 ‘섞임’을 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섞임’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예수는 요한복은 17장에 기록된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공중 기도에서 그의 제자들이 ‘구별’과 ‘섞임”의 경계인 적 삶을 살아야 하는것에 대해 언급 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구하지 않는 다”고 하였다. 이 균형을 우리들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유지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필연 우리의 편향된 시각으로 ‘구별’과 ‘섞임’의 평형을 잃어 버리기가 쉽고 그 결과 종종 이 균형 유지에 긴장을 느끼기때문이다. 그러나우리는 결코 한 쪽으로 기울여서는 안된다. 긴장을 느끼더라도 반드시 ‘구별’이라는 우측 날개와 ‘섞임’이라는 좌측 날개를 모두 사용하여야 한다. 구별은 우리공동체의 질적 성숙을 가져오고 섞임은 양적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구별이 우리의 체력을 길러 준다면 섞임은 우리의 체격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이 그리스도인 교육공동체가 푸른 창공을 향해 비상할 수 있는가 여부는 결국 이 두 날개의 평형을 어떻게 이루어 내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단한 경계가 아니라 좌우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대저 새는 좌우 양 날개로 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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