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 “잃은 양, 잃은 은전, 잃은 아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께서는 같은 주제의 세 비유를 말씀하셨다. 잃은 양, 잃은 은전, 잃은 아들(탕자)의 공통점은 "잃은" 바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문으로 보면 세밀한 의미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6절)과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7절)에서 "잃은"(lost)에 해당하는 원어는 모두 능동태(active)이다. 즉, 각각 양의 주인과 은전(드라크마)의 주인이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탕자에 대하여는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절)라고 묘사하는데, 사실 "죽는구나"의 원어는 앞서 두번 언급된 "읽은"의 원어와 동일한 헬라어 동사 아폴루미이다. 사전에서의 의미로 보면 "멸망하다, 망하다, 죽다"가 더 기본적이고 "잃다"는 의역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성경 번역에서의 표현은 다소 점잖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탕자가 혼잣말로 고백한 "여기서 죽는구나"가 원어의 본뜻에 일치한다. 비유들에서 "잃은"으로 표현했을지라도 실은 그대로 두면 양은 죽었을 것이며, 은전도 영영 찾지 못하고 녹슬거나 먼지에 묻힐 것이었다. 이처럼 "잃은"이란 말 속에는 심각하고 암울한 운명인 죽음이나 멸망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잃은 양과 잃은 은전과는 달리 탕자가 말한 "죽는구나"는 원어로 아폴루마이인데, 동사 아폴루미의 1인칭 중간태(middle)이다. 다시 말해서, 잃은 양과 잃은 은전에서는 능동태를, 탕자에서는 중간태를 각각 달리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문법에서 "주어가 자기 스스로에게 행위를 하는 것을 나타내는 중간태"를 사용하므로 탕자의 경우에 있어서의 의미는 탕자의 잃어버린(죽게 된) 바 된 것은 그 누구의 책임이 아닌 탕자 스스로가 한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분명 사람의 문제에 관해서는 양이나 은전과 달리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이 잃어버린 바 되고, 죽게 된 것은 전적으로 사람 자신들의 책임이다.
참고로, 나중에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했는데, 원문에서는 "내가 . . . 얻었노라"가 번역에서처럼 1인칭 능동태가 아닌 3인칭 수동태(passive)로 되어 있다. 즉, 주어가 아버지가 아닌 탕자이다. 직역하면 "그가 찾아졌다"이다. 탕자가 돌아오게 되고 죽지 않고 아들의 자리에 다시 회복된 것은 탕자 스스로가 해낸(?) 능동태나 중간태가 아닌 수동태 즉 타인에 의해 얻어진 선물인 것이다. 아버지의 말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잃은 아들을 찾게 했다는 감사가 내포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사람은 탕자처럼 스스로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거역하여 나갔고 결국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되찿은 바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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